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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사랑과위대한 희생 주제가 힘겨웠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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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24면

폭력과 혁명 사이 광기의 어디쯤, 자기를 던져 정의를 되묻는 희생과 대속의 아이콘.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힌 작품이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다. 1859년 발표된 이래 2억 부 이상 판매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 여러 사회계층을 폭넓게 조명하는 파노라마적 접근방식으로 운명적인 사랑의 삼각관계와 당대 사회상을 엮어놓았다. 대혁명의 포퓰리즘으로 개인적 복수를 포장하던 공포정치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웅대한 스케일 속에 녹아 있다.
그 소설이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아직 따끈따끈한 브로드웨이 2008년 작을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천재 작곡가 질 산토리엘로의 ‘뮤지컬 사상 최고 난이도의 노래’, 토니상을 4회 수상한 무대감독 토니 월튼의 무대 디자인이 ‘성경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찰스 디킨스의 텍스트와 만났을 때, 우리의 히어로는 어떤 모습일까.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서울 충무아트홀, 10월 7일까지

‘두 도시’의 영웅은 도시를 구한 수퍼히어로가 아니라 정의가 무엇인지 되물은 조용한 혁명가다. 혁명의 기운이 감지되던 18세기 말 프랑스, 과거의 악을 새로운 악으로 응징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던지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은 아니다. 온갖 악으로 점철된 시대에 절대선을 실천하는 어떤 이의 성스러운 희생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의 부활을 노래하기 위함이다.

영국인 변호사 시드니 칼튼은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염세주의자. 프랑스 귀족 찰스 다네이를 우연히 돕게 된 그는 찰스의 연인 루시 마네트에게 반해 새사람이 되지만, 루시는 찰스와 가정을 이루고 시드니는 주변을 맴돈다. 혁명이 일어나자 귀족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단두대에 오르게 된 찰스. 시드니는 사랑하는 루시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결심한다. 누군가를 위해 죄 없이 단두대에 오르는 시드니의 행동이 마치 예수의 대속과 부활처럼 성스럽게 그려질 때, 시드니의 낭만적인 순애보는 혁명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며, 개인적 증오를 해소하는 사회적 폭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 묻는 진지한 질문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상황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을 조명하는 가운데 안타까운 사랑과 위대한 희생을 그린 대서사시를 무대로 옮기는 과제는 힘겨워 보였다. 대서사시를 떠받칠 중심이 흔들린 탓이다.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성격은 판이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대립과 화해, 희생으로 향하는 큰 줄기는 얼마나 매력적인 소재인가. 그러나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지 못한 평면적인 연출은 주인공을 혁명 상황과 주변 인물에 매몰시켜 버렸다.

찰스와 시드니 두 주인공은 각각 개막 15분, 22분이 지난 시점에 느지막이 첫 등장하며 초반 몰입에 실패했다. 다이내믹한 캐릭터인 시드니가 나쁜 남자에서 착한 남자로 변신하고 결국 절대선을 행하는 과정이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중심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가 극에 자연스레 녹아들지 못해 주인공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 귀에 감기는 멜로디가 없는 것도 한몫했다. 성악과 출신 투톱 류정한과 전동석의 가창력 대결은 귀가 호사로울 정도로 ‘고난이도’로 들리긴 했지만 가슴에 와닿는 성질은 아니었다.

희생과 부활의 성스러운 순간을 묘사하는 엔딩은 여운을 남겼다. 어지럽게 돌아가던 철골 구조물이 깨끗이 물러나고 밤하늘 가득한 별빛에 잠겨 의연히 단두대에 오르는 시드니.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브루스 웨인의 유서에 그대로 차용한 ‘지금 나의 행동은 지금껏 내가 했던 그 어떤 행동보다 가치롭다’는 독백과 함께 조용한 혁명가로서의 감동을 전한다. 하지만 루시와 찰스에게도 공감의 끈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영웅의 희생이 관객의 마음속에 부활로 승화되길 바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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