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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전남 화순 완숙 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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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잘라놓은 벌집에서 황금색 꿀이 흘러내린다. 벌들이 온갖 것을 물어다 넣고 하얗게 꼭꼭 봉해놓은 벌집 속에서, 고스란히 50일 동안 잘 숙성된 완숙 꿀이다.

가수 조영남의 자서전에는 어머니 부업이 가짜 꿀 제조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짜 꿀은 조청과 기타 재료를 넣고 계속 저으며 끓여 만드는데, 어머니는 하루 종일 찬송가를 부르면서 솥을 저어 가짜 꿀을 만들었단다(오, 마이 갓!). 이러니 ‘꿀은 부자지간에도 믿지 못하는 법’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요즘은 가짜 꿀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지금도 물엿과 캐러멜, 향료 등을 섞은 가짜 꿀이 있고 제품명에 ‘벌꿀 차(茶)’라고 써놓아 소비자를 헷갈리게도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가짜가 많지는 않다. 양봉업이 늘어 워낙 저가의 꿀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 ‘1+1’으로 파는 꿀은 정말 싸다. 가짜가 아닌 꿀도 이렇게 싸게 팔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은 아마 누구나 가져봤을 것이다. 그러니 좋은 꿀을 취재하러 가는 마음은 꽤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취미로 양봉을 했던 시누이 덕분에 들은 풍월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들은 풍월’을 조금 읊어보면 이러하다. 꿀은 ‘진짜와 가짜’로 구별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진짜 꿀도 그 질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꿀은 밀원(蜜源)에 따라 아카시아꿀, 잡화꿀(야생화꿀), 밤꿀 등으로 구분한다. 벌의 종류에 따라서는 서양벌(洋蜂)과 토종벌(韓蜂)로 구분하는데 1년 수확량이 많지 않은 토종벌의 꿀이 비싸다. 특별히 목청·석청이라 불리는 고가의 꿀은, 그냥 토종벌이 아니라 야생벌의 꿀이다. 산 속에서 야생벌을 미행해 고목나무나 바위에 지어놓은 야생의 벌집에서 채취한다. 여기까지는 쉽다. 꽃 종류, 벌 종류로 구분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같은 벌로 꿀을 생산해도 꿀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가장 저가의 질 낮은 꿀은 사양(飼養)꿀이다. 사양이란 꽃이 없는 계절에 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설탕물을 먹여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사양 꿀은 벌이 설탕물을 먹고 만든 꿀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꿀이 가짜는 아니다. 꿀을 딴 후에 설탕을 섞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밀원이 꽃이 아니라 설탕물이라는 게 차이인데, 탄소동위원소 분석을 하면 꽃에서 따온 꿀과는 차이가 난다. 그러니 탄소동위원소 분석으로 품질관리를 했다는 꿀은 적어도 사양 꿀은 아니다. 최근에는 아예 사양 꿀임을 라벨에 밝혀놓고 싼 값에 파는 상품들도 있다. 설탕이나 물엿 대용으로 다양하게 쓰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흔히 있는 오해 한 가지! 겨울에 꿀이 굳으면 설탕 먹인 꿀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굳는 성분은 설탕이 아니라 포도당이므로, 사양 꿀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질 좋은 꿀 중에 굳는 꿀이 많다).

여기까지 알면 기본레벨은 습득한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벌이 꽃에서 꿀을 물어다가 놓은 것은 모두 같은 질의 꿀일까? 벌집에 들어온 지 3, 4일 된 꿀과 벌집에서 두어 달 묵은 꿀을 정말 같은 질의 꿀이라 할 수 있을까?

꽃 안에 있는 꿀은 ‘화밀(花蜜·넥타)’이고, 그것을 재료로 벌이 만든 꿀은 ‘봉밀(蜂蜜·허니)’이다. 그런데 벌이 물어다 놓은 지 얼마 안 되는 꿀은 아직 ‘봉밀’이 되지 못하고 ‘화밀’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많으며, 대체로 농도가 묽은 경향이 있다. 이것을 그대로 벌집에서 몇 달 숙성을 시키면 수분 함량이 줄어들고 맛도 좋아진다.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벌꿀이 되는 것이다.

나이보다 십 수 년은 젊어 보이는 임형문(81) 옹이 벌이 다닥다닥 붙은 벌집을 들어 보여주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전남 화순, 한약방을 운영한 서예가 임형문(81)옹의 양봉장이었다. 비가림막 아래 놓여진 수백 개의 벌통 주변에 서양벌들이 붕붕대며 날아다녔고, 팔순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혈색 좋은 임 옹이 벌이 다닥다닥 붙은 벌통을 직접 보여주었다. 한약상으로서의 관심과 취미가 결합해 벌을 치다 보니 50년 동안 해오게 되었고, 지금은 복분자주 생산업체를 하는 아들 임익재(47·연수당 대표)씨가 거들어 규모가 500개 정도로 늘어났단다. 규모로 보자면 멀쩡한 양봉업자이지만,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아 주로 가족들이 소비하고 남은 것을 지인들에게 조금씩 파는 정도라고 했다. 꿀의 생산량이 많지 않은 것은 오로지 완전히 숙성된 꿀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꿀을 취재하러 간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들의 설명은 이러했다. 벌이 화밀을 물어다 벌집에 넣어놓는데, 꿀이 벌집에 70~80%쯤 차면 더 이상 꿀을 가져오지 않는단다. 보통 양봉업자들은 이쯤에서 꿀을 따라낸다. 그래야 벌이 또 꿀로 채워 놓기 때문이다. 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꽃이 많이 피는 계절에 부지런히 꿀을 따라내야 한다.

그런데 임 옹은 꿀이 다 찼는데도 그대로 내버려 둔단다. 벌들은 꿀도 물어오지 않으면서 계속 들락날락거리고 날갯짓을 하는데, 그 날갯짓에 꿀의 수분이 증발해 농도가 진해진다. 그뿐 아니다. 벌은 들락날락 벌집에 머리를 처박으며 무언가 열심히 일을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약효성분들이 수집되고 생성된다는 것이다.

손톱보다도 작은 벌들이 어쩌면 저렇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연의 신비로움에 감탄이 나온다.

벌은 자신이 모은 꿀에 충분히 무언가를 모아놓았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벌집 구멍을 봉해 버린다. 임 옹은 벌이 구멍을 봉한 후 45~60일이 지난 후부터 꿀을 채취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8월 말이 되어야 그 해의 첫 꿀을 얻게 되는 것이다. 벌이 스스로 봉한 것을 두 달가량 더 숙성시킨 이 꿀을 이들은 ‘완숙 꿀’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꿀은 벌통 하나에서 1년에 뽑아내는 생산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성숙 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완숙 꿀로 비싸게 팔리는 것이 바로 뉴질랜드의 마누카꿀이다. 강한 항생작용이 있다고 하는데, 값은 2.4㎏짜리 꿀병으로 따져보면 50만∼100만원쯤이다. 그래도 꽤 잘 팔린다.

임옹 부자(父子)의 아쉬움은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마누카꿀은 항균 효능의 요소를 수치화하는 방식으로 엄격한 품질관리를 하고 있어 신뢰를 높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꿀은 그냥 꿀일 뿐이다. 미성숙한 꿀, 미성숙 꿀의 수분함량을 줄이기 위해 가열해 농축한 꿀, 벌집에 보름 정도 놓아두어 약간 숙성시킨 중간 꿀, 두 달 넘게 숙성시킨 완숙 꿀 등을 모두 똑같이 그냥 꿀이라고만 한다. 그러니 소비자의 신뢰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제값도 받지 못한다. 제 값도 받지 못하고 까딱하면 바가지 씌운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데, 누가 힘들여 질 좋은 고급 꿀을 생산하려 하겠는가.

이들의 바람은 학계와 정부 등과 함께 이 다양한 꿀의 질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고, 꿀을 등급화하는 것이다. 사양 꿀, 미성숙 꿀(농축 꿀을 포함해), 중간 꿀, 그리고 완숙 꿀, 이것들은 각기 가격도 달라야 하고 쓰임새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약효 있고 비싼 완숙 꿀을 불고기 잴 때 쓸 필요 없고, 넥타 수준의 꿀을 수준 높은 건강식품 취급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란 것이다. 이렇게 꿀을 등급화할 수 있어야 수입개방이 될 때 중국의 값싼 꿀에 대항할 수 있고, 마누카꿀 같은 세계적인 유명 꿀과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숙 꿀은 미성숙 꿀에 비해 농도가 진하다. 벌집을 잘라 유리병에 넣어 보관하다가, 벌집 째 입에 넣고 꿀을 빨아 먹는 것이 가장 편하다. 입에 남는 밀랍 성분의 벌집은 단물이 빠지고 난 후 뱉으면 된다.

그럼 완숙 꿀은 보통 꿀들과 정말 맛이 다를까 궁금했다. 그래서 일부러 대기업 제품의 꿀, 중소기업 제품의 꿀로 ㎏당 1만∼2만원 가격대의 두 가지를 사가지고 갔다. 맛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였다. 임옹은 벌집이 봉해진 지 50일쯤 지났다는 벌집을 잘라 맛을 보여주었다. 달다. 그야 꿀이니 단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어 내가 가지고 간 두 가지 꿀을 먹어봤다. 꿀의 향이 약하고 약간 느끼한 맛까지 돌았다. 이것만 먹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미성숙 꿀의 맛을 비교해 보니 이렇게 금방 알 수 있다니!

다시 완숙 꿀을 먹으며 비로소 깊은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섬세하게 복잡한 꿀의 향취가 뒤끝까지 깊게 남는다. 벌집을 꿀로 채우고 난 후에 벌이 부지런 떨며 무언가를 물어다 넣고 입으로 조리해 놓은 것을 두 달의 시간이 충분히 숙성시켜 놓은 오묘한 향기였다. 입만 이렇게 자꾸 높아지니 또 큰일이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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