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사랑의 의미 묻는 '푸른안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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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이혼한 후배를 떠올리며 '사랑한다면 결혼하지 말라' 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들은 불같이 뜨거워진 채 결혼했고 또 얼음처럼 차가워진 채로 헤어졌다.

정녕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저 사람과 입을 맞출 때 행복하다면 그건 사랑일 거라고 간주한 때는 스무 살 무렵이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확신하는 데 드는 시간은 얼마쯤이 적당한지,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그것은 다른지, 눈빛의 강도와 심장박동수는 또 얼마나 바뀌는지도 알고 싶다.

주말연속극 '푸른 안개' (KBS2) 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대생들 사이에서도 그 이야기가 관심거리인 모양이다.

극중에서 아내는 묻는다. 그 아이를 사랑하느냐고. 대답을 망설이는 남편에게 다시 묻는다. 그 아이와 잤느냐고.

사랑하는 것과 잠자는 일의 상관계수는 얼마나 되는 걸까. 정말 사랑해서 함께 자고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비율을 조사한 보고서는 없는지도 궁금하다.

이야기의 거죽만 보면 내가 미성년자일 때 규정을 어기고 본 '미워도 다시 한번' 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결혼과 출세에 도달한 40대다 (물론 통속의 잣대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

그는 배경이 없다는 이유로 장모에게 꾸준히 무시당하며 산다. 결혼에 배경은 필요하지만 사랑에는 필요치도 충분치도 않다.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란 아내조차 도발적인 20대에게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음으로써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그 '얼마' 란 물론 돈의 양이다.

나쁜 드라마는 별다른 고뇌 없이 '찍어내는' 드라마다. 무성의하기 때문에 나쁘고 시청자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에 나쁘다. '푸른 안개' 는 우리 시대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는 점에서 괜찮은 드라마다.

'옛날에 금잔디' 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온 작가 이금림씨,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등으로 사랑의 경위를 격조 있는 영상으로 보여준 연출가 표민수씨의 안목과 솜씨가 돋보인다.

불륜을 보여준다고 시청자들이 불륜에 불감증세를 보일 거라고 근심하는 건 명석한 판단이 아니다.

'푸른 안개' 는 나 혹은 나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하는 게 더 아름답고 덜 상처받을지 가늠하게 해 주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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