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의 의미 일깨우는 담백한 데생 하나

중앙일보

입력

"상뻬의 데생 한 컷이 흔해빠진 사회학 논문 1천편 보다 낫다" 는 '파리마치' 의 촌평은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그만큼 핵심을 찌르는 말도 따로 없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그의 신작 〈거창한 꿈〉이다. 도회지 보통 사람들의 등짝을 보듬으며 상뻬는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여보시게. 세상은 본래 삐걱거리고 엇나가는 것이 아니던??그 안의 사람들이란 것도 적당히 속물이지만, 알고보면 서로 외로운 위인들일 거야. 그러니 두 눈 모두는 말고, 한쪽 눈만을 지그시 감은 채로 세상을 바라보시게. "

사실이다. 상뻬는 본문에 종속된 이미지를 그리는 흔한 아류 삽화가가 아니다. 세상살이의 어떤 단면을 낚아채는 그만의 통찰로 독보적 반열에 오른 '데생 작가' 이다.

그만의 방식이란 '유머로 감싼 세상 관조(觀照) ' 일 것이다. 말은 많은데 막상 공허한 그런 잡문(雜文) 류와 반대로 은근한 여운이 감도는 한컷 승부에서 성공을 거둔다.

비슷한 내용의 신간〈어설픈 경쟁〉과 함께 나온 이번 책에서도 늘 그만한 즐거움을 보여준다. 두 권의 책은 1998년 이후 국내에 10여권이 집중 소개되면서 '상뻬 매니어' 가 생긴 책들의 후속물이다. 방식은 한 컷 한 컷이 독립되면서 한 호흡으로 읽히는 연작(連作) .

따라서 그전에 소개됐던 〈라울 따뷔랭〉〈좀머씨 이야기〉처럼 단선적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고, 국내에서도 사랑을 받았던〈속 깊은 이성친구〉식이다.

#데생 하나〓리조트가 세워진 멋진 해변가. 넥타이 차림에 구두를 벗어든 샐러리맨들이 무리지어 모래밭을 걷고 있다. 기업 등의 세미나 중 중간 휴식인 모양이다. 진행자로 보이는 두 아가씨가 멀리서 이들을 바라보며 말을 나누고 있다.

"처음엔 이 세미나를 조직하는 게 재미있었단다. 한데 지금은, 왠지 가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 (〈거창한 꿈〉19쪽)

#데생 둘〓폭우로 도시가 물바다가 됐다. 멀리 교회 첨탑이 보이고, 떠내려가는 자전거가 보인다. 서너명의 사람들이 뗏목에 몸을 겨우 싣고 떠내려간다. 뗏목 이름이 보인다. '여행자 호텔' . 부질없는, 위험에 찬 세상살이에 대한 상뻬의 은유다. (〈거창한 꿈〉53쪽)

또 하나 상뻬의 책에는 사랑과 불신이 교차하는 남녀간의 문제를 소재로 한 내용이 유난히 많다. 결혼식장에서 혼인서약을 하다말고 하객들을 바라보며 "저 여자 어때요□" 하고 묻는 턱시도 차림의 신랑(같은 책 33쪽) 등 그런 소재는 부지기수다. 상뻬에게 애정의 문제는 외로운 도시생활에서 '삶의 창문' 일까?

상뻬는 1932년 보르도 태생. 61년 첫 화집 출간 전후까지 인정을 받기에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지금은 '렉스 프레스' '뉴욕 타임스' 에도 기고하는 등 매우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80년대 전후 간헐적으로 한두 권이 나왔다가 98년 이후 집중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