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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내가 박근혜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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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내가 만약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라면 첫째, 돈 공천 의혹이 터졌을 때 ‘무조건 사과’부터 했을 것이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의 쇄신을 믿었던 유권자들의 실망과 배신감에 사과부터 해야 했다. 서병수 사무총장은 “(언론 보도) 하루 전 소문을 듣고 확인했다”고 말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한 착오다.

 사과 대신 “검찰에서 밝혀야 될 문제”라는 박 후보의 첫 반응도 매우 실망스러웠다. 물론 범법행위이기에 검찰에서 다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교과서 같은 이야기다. 마치 남 얘기하는 듯하다. 더욱이 우리 헌정사에서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다. 검찰의 조사를 기다리면서 여론이 가라앉을 시간을 벌거나, 아니면 그 시간 동안 검찰에 압력을 넣거나 정치적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뭔가 ‘면피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언론 보도 사흘이 지난 5일에야 나온 박 후보의 사과 멘트도 미적지근하다. “이런 의혹이 얘기되고 있다는 자체가 참 안타깝다”는 전제를 달고 “국민께 송구스러운 마음”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남 얘기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날 밤 새누리당 대선 후보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근혜가 “나는 책임질 일이 없다”고 말했다는 임태희 후보의 전언을 믿게 된다. 박근혜 측에서 “그런 말 안 했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박근혜라면 둘째, 검찰에 미루는 대신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먼저 내놓았을 것이다. 철저한 진상조사다. 결국 나흘 만인 6일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뒷북이다. 다른 대선 후보들이 ‘박근혜 책임론’을 들먹이며 ‘경선 거부’라는 자해수단까지 동원하자 마지못해 특위를 구성키로 했다. 박 후보가 먼저 특위 구성을 약속했다면 다른 경선 후보들의 떼쓰기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내가 박근혜라면 셋째, 진상조사를 하기도 전에 문제의 당사자(현기환 전 의원과 현영희 의원)들을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탈당 요구와 제명, 그 이후 진상조사라는 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의 현기환 전 의원이 새누리당을 향해 “(무조건 탈당을 요구하는) 이런 행태는 바뀌어야 한다”고 호통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벌어지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탈당을 거부하는 두 사람을 제명했다. 같은 날 사무총장이란 사람은 “무혐의로 밝혀지면 즉시 복당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일 처리의 순서가 맞지 않으니 말과 행동이 뒤죽박죽이다. 제명당해 더 이상 당원이 아닌 사람을 두고 무슨 당 차원의 진상조사란 말인가. 현영희 의원은 비례대표라 제명당하면 의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제명이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된다.

 내가 박근혜라면 넷째, 돈 공천을 뿌리 뽑을 혁신안을 내놓을 것이다. 돈 공천은 정치판의 고질병이다. 고쳐지지 않는 것은 병의 원인이 뿌리 뽑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바로 공천권이다. 지역별 지지 정당이 확연하기에 공천은 곧 당선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누구든 공천권을 가진 사람에게 돈이 몰리게 되어 있다.

 박 후보가 아무리 “독립된 공천위원회에서 했으니 책임 없다”고 해도 안 믿어준다. 현기환 전 의원, 현영희 의원만 아닐 것이다. 현 의원이 운전기사를 보좌관 자리에 앉혔다면 이번 사건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 후보가 다시 신뢰를 얻으려면 문제의 뿌리인 공천권 자체를 포기하면 된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 방법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정치개혁분과에서 이미 논의 다했다. 국민들이 후보를 직접 뽑는 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하자는 얘기가 다수였다. 비례대표의 경우도 개방형 명부로 만들어 유권자가 선택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개혁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가 박근혜라면 마지막으로, 공천개혁을 대통령 선거 이전에 단행하겠다. 공천권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권력이기에 ‘대통령 선거 끝난 다음 포기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공천개혁은 돈 공천 비리에 대한 원인 처방일 뿐 아니라 정당 민주화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사분오열로 리더십이 부실한 민주통합당이나, 정치적 자산이 없는 안철수 교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공약이다.

 박 후보가 이런 큰 정치를 펼칠 때 그녀를 헐뜯으려는 작은 정치인들은 저절로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