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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묘유의 미학, 달항아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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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호 27면

어떤 물건이라도 아련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 물건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한참을 머물면서 감상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어느 도예전시관에서 본 달항아리가 그랬다. 단아한 분위기와 기품에 매료돼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순백색에서 풍기는 맏며느리 같은 풍성함과 순박함, 넉넉함이 담겨 있었다. 그 안에서 담백함과 비움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삶과 믿음

수 년이 흐른 지금, 마음 한쪽에 자리잡은 이런 기억을 되살리게 한 건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공 이야기’라는 공방이었다. 단출한 공방이었지만 내용은 충실했다. 이곳에서 다시 달항아리를 볼 기회가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폭 넓은 흰 빛, 물레를 돌리면서 생긴 원형의 선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의젓한 곡선미는 알 듯 모를 듯한 아름다움의 한 가닥이었다. 그러면서도 비움의 미학이 자리했다. 순백의 마음을 상징했다고 할까.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미술사학자 고(故) 혜곡 최순우 선생도 달항아리를 예찬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백자 항아리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려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했을까 싶다. 달항아리가 주는 안식의 순간을 더 갖고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한 점 한 점 살폈다. 크기가 크든 작든 관계없이 그 나름의 평화로움이 밀려왔다.

공방에서 40대 중반의 도예가 손호규 작가를 만났다. 그로부터 달항아리에 얽힌 경험을 듣다 보니 평화로움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달항아리엔 한국인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야 단순한 색깔과 단순한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달 항아리에 있는 선과 색깔이 주는 예술적 깊이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절제미와 포근함이 있습니다. 마치 인생을 겪은 부모님 같은 숨결이지요.”

그는 달항아리를 작업하면서 인생을 배운다고 말했다. 모든 것엔 순리가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큰 욕심 없이 빚다 보면 감동스러운 작품이 탄생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오래 기다려 흙의 성질에 맞춰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달항아리를 만들려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연한 흙에 힘을 강하게 가한다든지 가마 온도를 급하게 올리면 실패합니다. 달항아리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순리대로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화려한 색감과 화려한 선을 가진 어떤 도자기보다 깊이가 있고 매력이 있는 도자기가 탄생합니다.” 그는 “성급한 마음, 준비되지 않는 마음으로 달항아리를 만들면 그 마음이 그대로 항아리에 반영된다”고 덧붙였다.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 동상과 입선 경력의 손 작가는 20여 년의 풍부한 도예 경험에 바탕해 시대에 맞는 선을 찾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달항아리가 주는 영감(靈感)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의 말을 다 들은 후 또다시 달항아리를 자세히 바라봤다. 속은 비어 있으되 겉은 보름달이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다. 나를 비우면 자신은 물론 주위에 오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육관응 원불교신문 편집국장. 글쓰기사진을 통해 명상과 알아차림을 전하고 있다. 숲과 들을 접시에 담은 음식이야기, 자연 건강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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