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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 비무장지대를 무장해제 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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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진가 노순택은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북을 보는 군인의 뒷모습을 찍었다. 군인 옆엔 촬영금지 문구가 있는데, 노씨는 이것도 버젓이 찍은 데다가, 찍은 곳에 이 사진을 걸어뒀다. 제목은 ‘살려면 vs. 왔으면’. “살려면 나는 보여선 안되고, 상대방을 끊임없이 봐야 한다”는 게 작가의 설명. 군인이든 안보 관광객이든, 여기 왔으면 누구나 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찍는다. [사진 노순택]

‘지키지 않는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 ‘촬영금지’ ‘자신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이런 생경한 구호가 여기서는 익숙하다. 휴전선 248㎞의 5분의 1 이상이 걸쳐 있는 강원도 철원군. 서울서 두 시간 반 거리의 접경지다. 땅이 비옥한 철원은 경원선 철로가 놓이며 일제 수탈의 거점이 됐다. 해방 후엔 북한 땅이었고, 휴전 후엔 이주민들이 지뢰밭을 개간해 오늘에 이르렀다. 통제와 보호 속의 60년, 공장 하나 없는 청정지역이 됐다.

 여기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사진가 노순택(40), 독일의 디륵 플라이쉬만(38), 프랑스의 프랑소와 마자브로(30) 등 11개 팀이 참여한 ‘리얼 DMZ 프로젝트’(기획 SAMUSO)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 비무장지대. 하지만 이곳에는 철저히 무장된 대치와 긴장이 감돌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DMZ의 역설을 미술로 말하는 자리다.

김량, 나의 잃어버린 처소, 철원 노동당사 앞.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월정리역, 1975년 발견된 제2땅굴, 노동당사 등 ‘철원 안보관광’ 코스 곳곳에 예술가들이 작품을 설치했다. 전시는 휴전 기념일인 28일 시작된다. 23일 작가들과 함께 미리 둘러봤다. 폐허가 된 3층 건물인 노동당사 앞에는 재불작가 김량(40)이 모지게를 이용한 설치 ‘나의 잃어버린 처소’를 세웠다. 모지게는 모판을 나르는 데 쓰는 철제 농기구다. 노동당사는 북에서 남한에 지은 건물로 유일하게 남은 것. 해방 후 지주들의 사유재산을 빼앗는 거점으로도 활용됐다. 곳곳에 총구가 남아 있는 이 노동당사 앞에 김량은 실향민인 아버지가 잃어버린 집, 자신이 떠돌던 집, 이곳에 ‘선전마을’을 세웠던 정부 시책 등 역사를 버무렸다.

김씨는 “이곳에 사람이, 다른 지역 농민들과 똑같이 살고 있는 줄 몰랐다. 일상성과 보편성이 여기서도 구현된다는 데 경이를 느꼈 다”고 했다. 일주일간 군부대 네 곳에서 군인들과 생활하며 비디오를 찍은 프랑스의 아망딘 페노(30)는 “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훈련을 계속 받지만 그걸 언제 써먹을 수 있을지, 기막히다”고 했다.

 철원에서는 휴전 협정 중에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에선 열흘 간의 전투 중 주인이 24차례 바뀌었다. 대전차지뢰를 묻기 위해 도로 군데군데 낸 구멍이 오늘의 철원을,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증언한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 사는 곳, 1차 산업 외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 대안은 안보관광. 안보와 관광의 양립, 지독한 모순형용이지만 이곳에서는 그걸 필요로 한다. 서경원 부군수는 “안보 불안을 해소하고 오늘의 경제 성장을 이룩한 데는 군인뿐 아니라 60년간 불편을 감내해 온 철원 주민이 있다. 이곳에 많은 이들이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역미술 프로젝트 하면 흔히 벽화 단장을 떠올린다. 반면 ‘리얼 DMZ 프로젝트’는 다소 묵중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나의 아름다운 처소’를 본 주민 김정희씨는 “흔한 농기구인 모지게가 작품이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고 했다. 미술의 충격인 셈이다. 미디어 아트의 거장 안토니 문타다스(70·MIT 방문교수)는 “마지막 분단국인 한국은 가장 극단적 상황에 처해 있다. 작가들은 여기서 작업하며 집약된 영감을 얻을 거다. 또한 어느 곳에서든 예술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정치적이고도 군사적인 상황 이외의 다른 생각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은 마을을 바꿨지만, 예술은 또 그걸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얼 DMZ 프로젝트(realdmz.org)= 9월 16일까지. ‘철의 삼각 전적지’ 관광사업소에서 하루 네 번 진행되는 투어(성인 4000원)에 합류하거나, 매주 토요일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출발하는 1일 버스 투어(식사 포함 3만원)를 이용하면 된다. 070-8233-5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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