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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부모’ 둔 장병 속속 입대…10년 후엔 1만 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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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호 08면

한국은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옮겨가고 있다. 국내 장기체류 외국인 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6만5006명이다. 국제결혼도 급증해 2004년 이후 꾸준히 연 3만~4만 건에 이른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외국인들의 거주 비율이 높은 곳에는 먹거리를 비롯한 다양한 이국적 문화가 넘쳐난다. 외국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자녀’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학교도 사회도 이들을 맞아들이는 중이다. 다문화 자녀들이 성장해 입대하면서 군(軍)도 다문화 물결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국방부는 2009년 12월 병역법과 시행령 등을 바꿔 인종·피부색 등의 이유로 현역 입대를 피할 수 있던 규정을 모두 없앴다. 2011년 이후 이들은 속속 군에 입대하고 있다. 현재 200명 안팎이지만 매년 그 수가 늘어나 10년 후에는 1만 명 가까이 될 전망이다. 다문화 시대를 맞아 달라지는 우리 군의 모습을 취재했다.

다문화 시대, 달라지는 병영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육군 ○○사단. 면회소 겸 강당인 충일다산관 입구에 ‘하나 되어 충성’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이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적응을 잘합니다. 군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사단 본부에서 만난 장병훈 본부대대장(36·소령)은 ‘다문화 부하들’ 자랑에 눈이 빛났다. 장 소령이 칭찬하는 부하들은 채수동·수명 쌍둥이 형제(23).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가정 출신 장병들이다. 이들은 다문화가정 출신이면서 쌍둥이 형제로는 군에서 처음 맞은 장병들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6세 때 필리핀으로 건너간 뒤 현지에서 초·중·고교를 거쳐 대학을 다니다 자원 입대했다. 지난해 6월 최전방에서 훈련을 받은 뒤 8월 ○○사단에 배치받아 1년 가까이 근무 중이다.

장 소령은 “처음에는 외국인 어머니를 뒀다는 말에 동료 장병들이 다소 신기하게 생각하기도 했다”며 “고된 훈련은 물론 24시간 병영 생활을 함께하면서 명실상부한 전우가 됐다”고 말했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에서 오래 살다 보니 우리말이 서툴렀다. 어느 정도 우리말을 깨우칠 시간을 벌기 위해 1년이나 입영을 연기한 끝에 입대했지만 처음에는 의사소통 문제로 애를 먹기도 했다.

채수동 상병의 직속 상관인 성승훈(37) 상사는 “본인들이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지만, 선임병과 장교들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쓰는 등 먼저 다가서 간극을 좁히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했다.

예전보다 많이 개선됐다지만 여전히 엄격한 선임·후임병 사이의 위계질서 등 한국군 특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해병대 출신 한국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원입대한 만큼 이들은 열정적으로 생활하며 적응했다. 7월 9일 사격 훈련에서 형제가 20점 만점에 19점, 18점을 각각 받아 ‘특등사수’가 되기도 했다. 쌍둥이 형제들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꼭 군대를 가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며 “힘들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형제의 군 생활 적응에는 지휘부의 배려와 관심도 한몫했다. 드러내 놓고 특별대우하는 일은 없었지만, 개인의 특성에 맞춰 배치 부서를 결정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준용(준장·육사 37기) 사단장은 “당초 일반 예하 대대 배치도 고려했지만 한국 문화나 말에 익숙지 않은 점을 고려해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본부 대대 산하 인근 부서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채 상병 형제 외에도 군에는 다문화가정 출신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6월 초에는 이란계 어머니를 둔 이모 훈련병이 논산훈련소에 입대, 훈련을 마쳤다.
일반 장병이 아닌 부사관 탄생도 앞두고 있다. 육군 부사관학교에는 각각 베트남·일본인 어머니를 둔 배준형(22)·한기엽(21) 후보생이 교육을 받고 있다. 7월 4일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두 사람은 부사관학교 교육이 끝나는 10월 정식으로 임관할 예정이다. 외국인 부모를 둔 부사관의 탄생은 창군 이래 처음이다. 배 후보생은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온 대한민국 군인의 꿈을 이루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을 포함해 현재 군에는 200명이 넘는 다문화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지만 국방부는 가급적 다문화가정 출신 장병의 수치를 발표하지 않을 예정이다. 장병 개인에 대한 노출도 가급적 억제한다는 방침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의 다문화 정책 핵심은 이들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수치를 집계하고 이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정책 방향과 어긋나기 때문에 비공개 방침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직은 적은 숫자지만 앞으로 군에 입대하는 다문화 장병의 수는 급속히 늘어날 전망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젊은이 중 올해 징병검사 연령(19세)에 해당하는 사람은 1165명이다. 2016년엔 2000명을, 2019년엔 3000명을 넘어선다. 특히 국제결혼이 연간 3만 건 이상으로 급증한 2004년 이후 출생한 다문화가정 남성이 입대 적령기가 되는 20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매년 8000명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2년 정도인 복무 기간을 감안하면, 이때부터는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다문화 장병이 군에 근무하게 된다.

이들은 저출산으로 인해 입대자 수가 줄어드는 군 현실에서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설동훈(사회학) 전북대 교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20년 남짓 살아온 이들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국민이며, 충성심도 확보된 것”이라며 “군에서 이들을 잘 활용하고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만드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다문화 장병들이 크게 늘면 여러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가장 큰 우려는 이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다. 다문화가정 관련 활동을 해 온 지구촌사랑나눔교회 김해성 목사는 “생김새나 문화 등의 이유로 차별이나 왕따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총기를 다루는 군의 특성상 이런 문제에 대해선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두승(사회학) 서울대 교수는 “불행히도 우리 국민은 다른 인종과 민족에 대한 배타적 성향이 강한 편”이라며 “이로 인한 부작용이 군 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잘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방부도 다문화 장병 시대에 맞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우선 다문화 장병들에게 차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상징이나 문구를 없애거나 줄였다. 올해 2월 22일 대통령령인 ‘군인복무규율’ 5조의 입영·임관 선서의 문구에서 ‘대한민국의 군인(장교)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라는 부분을 ‘국가와 국민’으로 개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또 각 군 규정에 인종·피부색 등 다문화 장병과 관련된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을 담았다.

다문화가정 출신들의 군 복무 적응을 위해 ▶친구·형제 등과 함께 동반입대는 물론 동일부대 근무가 가능하도록 하고 ▶다문화 장병의 능력이나 특성에 맞게 통·번역 업무를 맡기거나 해외 파병요원으로 차출하는 등 배려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출신 병장들의 수가 아직은 소수여서 음식·종교 등과 관련된 문제는 없지만, 앞으로는 소수 종교 활동의 여건을 보장하는 등 체계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군 생활 자체가 다문화가정 출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많다. 국방연구원 독고순 연구위원은 “적어도 2년간 늘 함께 생활하는 군 생활은 다문화가정 출신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적응하고 이해하는 데 효율적인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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