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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의 정치경제학과 경제민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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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박용석]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부 장관

“정치인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심지어 강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겠다는 약속까지 하니까.” 이는 구(舊)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이 지적한 말이다. 선거철이 되면 상식에 어긋나는 공약마저 서슴없이 내거는 민주주의 국가 정치인들을 폄하(貶下)한 것이리라.

 지난 총선에 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공짜점심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제 닭 제 잡아먹기” 격이거나 중장기적 국가발전에 장애가 되고, 다음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각종 ‘무상복지’ 시혜 공약으로 시끄럽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 뜻조차 애매모호한 ‘경제민주화’란 기치를 내걸고 여야가 경쟁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직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판국에서 범국민적 논의와 전문가들의 충분한 검토 없이 헌법에 삽입되었다. 그동안 경제민주화는 우리 국민 모두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한 보편적 가치의 선언적 수사(修辭) 정도로 치부돼 왔다.

 물론 일반 경제학 교과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용어를 위키피디아 사전은 “경제민주주의는 의사 결정권을 주주로부터 근로자, 고객, 공급자, 이웃과 일반 대중을 포함하는 이해당사자 그룹으로 이관할 것을 제의하는 하나의 사회경제철학”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이것은 간명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개념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실제 이 용어의 해석은 여러 갈래다. 일부 학자들은 과거 유고슬라비아식의 근로자 자율 경영 기업과 투자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기초로 하는 경제민주주의를 기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논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경제체제 개혁적인 심각한 이념적 함축성마저 내포하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단순한 선거전략 차원에서 이 용어를 앞세워 선명성 경쟁을 한다면 불필요한 국내외적 오해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 우려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 기치 아래 ‘재벌 때리기’ 전략으로 국민들의 표심(票心)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현실을 특히 재벌과 대기업은 심기일전(心機一轉)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재벌 때리기가 먹혀들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없다면 선거철에 이런 기치를 내세우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현재 우리는 세계화의 가속화와 지식기반경제시대의 심화라는 큰 세계사적 흐름 속에 살고 있다. 그 결과 교육격차, 전문성격차에 따른 임금격차가 과거 어느 때보다 커지고, 이에 따른 소득분배 악화와 부의 격차 확대로 양극화의 소지가 커졌다. 세계화 속에서 재벌과 대기업의 ‘규모의 경제’에 밀릴 수밖에 없는 중소·중견기업과 서민상권의 생태적 어려움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때에 정치권에서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의 상징으로 재벌과 대기업을 골라 때리기가 안성맞춤인 것이다.

 문제는 세계시장에서 그나마 규모의 경제 이점을 최대한 살려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재벌기업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무분별한 재벌 때리기는 국민경제적 자해(自害)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재벌과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에서 오는 불공정 행위는 철저히 막는 공정거래 차원의 조치강화와 함께 지주회사화 등을 통한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더욱 투명하게 해야 함은 당연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재벌기업들의 솔선수범적 변화다. 우선 서민들과 중소기업,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골목상권 침해, 하도급 업체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스스로 막아야 함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소·중견기업들과 상생, 동반성장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 중소·중견기업들에 물어보면 안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를. 이러한 재벌과 대기업 스스로의 노력이 있을 때 국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고 정치권의 표심 잡기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보완·유지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권은 경제민주화란 수사에 얽매이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소득분배 개선과 양극화 완화 방안과 함께 진정한 국민복지를 위한 ‘일자리 친화적(job-friendly) 성장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면적 교육개혁과 근로자의 훈련·재훈련 체제 강화방안을 제시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윈스턴 처칠이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는 다른 어느 정치체제보다 장점이 많다. 그러나 소모적이고 비효율적 선거과정을 거쳐야 하는 약점이 있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현명하게 치러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가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공일 <중앙일보 고문·전 재무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