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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무덤 못잖은 스케일… 죽어서 神이 된 쑨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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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호 11면

5월 1일 노동절 연휴를 맞아 중산릉을 찾은 사람들이 길고 긴 인파를 이루고 있다. 중산릉은 풍수의 명당인 쯔진산(紫金山)에 있는데 쑨원(孫文)이 직접 고른 장지다. 장제스(蔣介石)는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거대한 묘역을 조성했다.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 있는 쑨원(孫文) 묘역이 그렇게 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과 대만 모두 국부로 인정할 만큼 역사적 인물이지만 근대 지향적인 그의 삶이 준 선입견 때문에 묘소는 경건하면서도 검소할 것 같았다. 5월 1일 노동절 연휴를 맞아 쯔진산(紫金山)의 동쪽 사면에 있는 중산릉(中山陵)에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중국은 인구가 많다고 하지만 인구 밀도는 한국보다 한참 낮다. 한국은 남한만 치면 9만8000㎢에 5000만 명인데 중국은 960만㎢에 14억 명이다. 나라는 100배 정도 큰데 인구는 28배밖에 많지 않다. 중국의 서부가 사막이라고 치고 반만 계산해도 한국이 훨씬 득실득실하다.

[홍은택의 중국 만리장정] ⑫쑨원 묘, 중산릉

그러나 산사태를 일으키는 건 연중 강수량보다는 집중호우이듯이 땅덩어리와 관계 없이 수많은 인구가 일순간 한데 모일 수 있다는 데 위험이 있다. 종종 중국에서 백화점 바겐세일에 압사사고가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산릉에 몰려든 군중을 보고 잘못하면 깔려 죽겠구나 실감이 난다. 하지만 묘역은 이 사람들을 너끈히 수용했다.

중산릉원의 문을 통과하자 묘역을 알리는 패방(牌坊)이 보였다. ‘박애(博愛)’라는 글자가 헌액돼 있어 ‘박애방’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을 통과해 송백의 숲길인 묘도(墓道)를 375m 걸어가자 비로소 정문인 능문(陵門)이 나온다. 능문에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쑨원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좀 더 올라가자 ‘중국 국민당 총리 쑨 선생 여기 묻히다. 중화민국 18년 6월 1일’이라고 적힌 비석의 비정(碑亭)이 나왔다. ‘이제 묘실이 나오겠지’ 생각했는데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하나, 둘, 화강암 계단을 올라간다. 모두 392개. 세 개의 문이 있는 제당(祭堂)에 도착한다. 문 위에는 삼민주의의 민족·민생·민권이 각각 헌액돼 있고 그 위에 ‘천하정기(天下正氣)’라고 적혀 있다.

줄을 기다려 제당의 대청으로 들어가니 쑨원의 좌상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 바퀴 돌고 나온다. 대청 뒤에 원형의 묘실(墓室)이 있고 그 안에 쑨원의 와상이 있지만 최근 무료 개방 이후 인파가 몰려들자 묘실을 폐쇄했다고 한다. 대신 제당 옆에는 묘실 내부사진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이 늘어서 있다. 보는 데 1위안짜리 동전 두 개를 밀어 넣어야 한다. 여기까지 와서 실물의 묘 대신 사진 보고 가라고 한다. 미술관에서 그림은 안 보여주고 화첩을 보고 가라는 것과 같은 허무극이다. 공안들은 소리를 지르며 대리석으로 된 좌상조차 촬영을 금했다.

그래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런타이둬(人太多·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 한 마디면 중국에선 많은 것이 양해된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렇게 길고 넓은 묘역을 가득 채운 인파를 보고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자신도 인파가 만든 장관의 일부가 된 데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것까지는 아니겠고 재미있어 했다. 제당에서 내려다보자 인파가 시내처럼 멀리 산 아래로 흘러내렸다. 묘실 관람 여부를 떠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나라를 유지하고 밥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산릉에서 20분쯤 서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1368년 난징에 처음으로 통일왕조의 수도라는 지위를 안겨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효릉(明孝陵)이 나온다. 주가 생전에 10만 명을 투입해 짓기 시작해 아들인 성제가 완공한 32년 대공사의 결정판이다. 부인인 마씨 부인과 합장한 능 자체만 해도 직경 400m의 바오딩(寶頂)이라는 언덕이고 능을 둘러싼 방성(方城)의 둘레도 22.5㎞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도 묘를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주원장을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지궁(地宮)에 안치한 뒤 폐쇄하도록 했다. 도굴꾼들이 이미 다 유물들을 훔쳐갔을 거라는 추측이 있지만 폐쇄됐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명효릉을 보고 나서도 여전히 중산릉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근대 정치혁명 지도자의 묘가 황제의 묘와 비견되고 풍수의 명당인 쯔진산에 나란히 매장돼 있다는 게 마치 양복 재킷에 한복 바지를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난징은 예부터 ‘종산용반(鐘山龍蟠), 석성호거(石城虎踞)’라고 불려왔다. 종산(쯔진산)은 용처럼 똬리를 틀고 있고 석성은 호랑이처럼 엎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쯔진산은 해발 448m로 청계산(618m)과 우면산(298m)의 중간쯤 되지만 평지로부터 곧장 솟아서 위용이 있다. 이곳에 처음 묘를 쓴 ‘유명 인사’는 1700여 년 전 난징에 처음 성을 쌓은 오나라의 제왕 손권(孫權)이었다. 그러나 이 터를 탐낸 친일 ‘국민정부’의 수반 왕징웨이(汪精衛)에 의해 파헤쳐지고 1944년 왕 자신이 그 터에 묻혔다. 일본 패망 후 46년 국민당 정부가 다시 파헤쳤고 지금은 매화산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애꿎은 손권의 묘만 날아갔다.

쑨원의 서거 당시 기사를 보면 그의 병상에서 사람들이 장지를 의논할 때 그가 스스로 ‘쯔진산’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1925년 3월 19일자 신보(申報)에 따르면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에 있을 때 쯔진산에 놀러가서 현재 중산릉이 있는 곳에서 지세를 보고 명효릉보다 훨씬 좋다면서 점지해뒀다고 한다. 쑨원의 임종을 지켰던 사람이 바로 왕징웨이다. 국공합작의 지속적인 추진을 골자로 한 쑨원의 유언을 받아 적은 당사자다. 왕은 그때까지만 해도 쑨원의 충직한 측근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쯔진산이 어디에 있는 산인지 몰랐다.

사실 명효릉에 음습한 기운이 도는 것에 비해 중산릉은 더 높고 햇볕이 잘 들었다. 먼저 고를 수 있었던 주원장은 아마 난징의 도성에 더 가까워서 지금의 위치를 고른 듯하다. 죽어서도 너희들을 굽어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쑨원은 그렇다고 주원장처럼 장대한 묘역을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곳에 묻히면서 국민에게 단지 한 줌의 흙을 (뿌려 달라고) 간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풍운아였던 쑨원은 죽어서도 순탄치 않았다. 민생과 민권을 강조한 그의 뜻과 달리 국민당은 중산릉의 설계를 공모하고 착공하고 완공하는 데 4년을 썼다. 그동안 그는 베이징의 향산에 있는 절에 안치돼 있었고 미국인 의사 테일러가 내장을 적출하고 포르말린을 뿌린 뒤 정기적으로 방부 상태를 점검했다. 중국이 가장 힘들 때였다. 외세의 압박이 심한 가운데 나라는 군벌들로 사분오열됐다. 당시 난징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선교사 펄벅의 눈은 예리했다. 권위가 부족했던 장제스가 쑨원의 후계자로 올라서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그의 무덤을 계승의 증거로 활용했다고 봤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수백 채의 집과 점포가 장제스의 불도저에 의해 철거됐다. “펄벅은 장제스가 화려한 길을 닦으라고 명령한 그날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총을 한 방도 쏘지 않은 채 첫 대승을 거둔 날이라고 표현했다.”(『펄벅 평전』, 피터 콘)

난징은 우한(武漢)·충칭(重慶)·난창(南昌)과 함께 가장 무더운 4대 화로 중 하나다. 테일러는 5, 6월 운구되는 동안 부패될 걸 우려했고 우려대로 쑨원의 두 손을 뒤로 감춰야 했다. 애초에 쑨원보다 1년 전에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안치된 레닌처럼 얼굴과 몸이 투명하게 보이도록 유리관에 안치하려고 했지만 유리관은커녕 영결식에 두 손마저 공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중산릉은 이후에도 두 번의 고비가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이 난징을 점령하자 묘역을 파헤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일본군은 성명까지 내며 손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마지막은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망갈 때 유해를 가져갈 것을 검토했지만 폭파 과정에서 시신이 손상될 것을 우려해 포기했고 중산릉은 난징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명효릉의 기념관에는 황제들의 수명이 기록돼 있다. 주원장 71세와 성조 65세, 세종 60세, 신종 58세를 제외하고 나머지 12명의 수명은 이렇다. 26, 48, 38, 38, 30, 41, 36, 31, 36, 39, 23, 35. 마흔을 넘기 힘들다. 마치 이렇게 풍수 좋은 곳에 묘를 크게 써도 후손이 잘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명대 황제들의 평균 수명은 41.2세로 청대의 52.4세나 남송대의 45.6세보다 낮다. 통치자들의 무덤은 그 또는 후계자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중산릉에 지금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오르는 데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영웅이 죽으면 사당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사당에 돈을 바치며 소원을 비는 중국의 전통과 잇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 부적이 팔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죽어서 신이 된다.



홍은택.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는 등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NHN 부사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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