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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쉬어가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8호 04면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을 처음 들렀을 때의 감흥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대숲길 사이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작은 계곡 위로 어느새 나타나는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대나무숲 사이로 들리는 바람소리와 계곡 물소리 속에 펼쳐진 고즈넉한 풍경은 무릉도원에 다름없었죠. 깊고 맑을 소(瀟)자에 비바람 소리 쇄(灑)자가 “소쇄소쇄” 하며 노래하는 것 같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얼마 전 지인들과 담양에 들렀다가 소쇄원을 다시 찾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가고 있는데, 소쇄원 도착 직전 도로변에 차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바로 식영정(息影亭).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었다는 곳이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한아름이 넘는 거대한 소나무였습니다. 거북이 등짝 같은 두툼하고 견고한 표피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는 사방이 탁 트인 상쾌함을 주었죠. 저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에 누웠습니다. 그림자도 같이 누웠습니다. 솔바람이 솔솔 불었습니다. 손때 묻은 나무바닥의 메마른 감촉이 좋았습니다. 시간도 그렇게 쉬어갔습니다.

한눈에 내려다보인 광주호는 당시 가뭄으로 졸아있었습니다. 이번 비로 다시 물이 찼겠죠. 문득 식영정 마루에 누워 듣는 빗소리가 궁금해집니다. 그렇게 넉넉해진 마음으로 올 하반기는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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