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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의 무릎 나온 운동복 그런 평범한 게 더 어려워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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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호 19면

그는 청담동의 한복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촬영 전에 작업의 상당 부분이 마무리되는 일의 특성상 한복에서 손을 뗀 지도 꽤 됐을 텐데 ‘후궁’이 흥행몰이를 하는 사이 그가 작업한 또 다른 영화가 개봉을 했는데도 말이다. ‘후궁’의 의상 일부를 제작했다는 그곳에서 조 감독은 ‘한복 일’을 한다고 했다. 사극으론 첫 작품이었던 ‘후궁’이 한복 디자인이라는 또 다른 일로 그를 이어준 것이다. 어차피 옷과 관련한 일이니 ‘후궁’ 작업과 큰 차이도 없을 것 같은데 그는 “목적이 다르니까 전혀 다른 일”이라고 했다. 옷은 옷이지만 영화 의상의 방점은 ‘의상’에 찍힌 게 아니었다 . 영화 의상을 시작한 것도 “옷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화가 좋아서”라고 했다.

Who Are You : 영화 ‘후궁’ 의상감독 조상경

내시 입는 철릭은 청바지 천으로... 장난 좀 쳤죠
-‘후궁’이 첫 사극이었는데 어떤 점이 다른가요.
“한복은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달라요. 풀샷으로 들어가야 하는 옷인데 타이트하게 들어가서 아까운 적도 있고, 감독님이 옷을 봐서 부감으로 찍어준 적도 있고요. 그래서 촬영장엔 잘 안 가는데 이번엔 자주 가게 됐죠.”

-옷을 보고 영화 시대배경을 콕 집어내지 못했어요.
“시나리오엔 왕조가 표시돼 있지 않았어요. 김대승 감독님에게 시대를 잡고 가야 한다고 했죠. 발 디딜 곳이 필요하다고. 제가 조선복식사를 쫙 보고 그중에서 후궁에게 맞는 실루엣을 가진 시대를 제안했는데 그게 14~16세기 초반이에요.”

-기존 사극에서 보던 한복과는 다르기도 했고요.
“후궁을 맡고 몇 달을 밤새워 TV 사극을 다 받아 봤는데 90년대 사극 의상이 훨씬 좋았어요. 요즘 사극 의상은 좀 의아했고요. 수양대군이라고 명시된 인물이 입은 게 수양대군의 옷이 아니고, 당의가 없던 시대인데 공주가 예쁘게 당의를 입고 나와요. 고종의 옷을 세종이 입어도 아무렇지 않은 거죠. 사람들이 조선 후기 한복에 익숙해져서 이런 데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관객에겐 오히려 ‘후궁’의 의상이 낯설었던 것 같은데.
“김 감독님이 조선 후기로는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림·유물 같은 사료를 보여주면서 의상을 만들었고 자신 있게 작업했어요. 전통 한복 하시는 분들은 칭찬도 해주셨는데 고증에 대한 불신이 있는 거예요. 처음엔 당황해서 다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죠. 작업하고 시간이 흘러서 좀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까 ‘아, 내가 배색을 그렇게 했구나’ 싶더라고요. 이를테면 붉은색 옆에 중국은 샛노랑을 대고 일본은 흰색을 대요. 우리는 빨강 옆에 파랑을 써요. 배색에 따라 느낌이 크게 달라지는 거죠. 깃에 블랙을 댔던 대비의 의상에 대해 제일 말이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 같아요.”

-의상도 픽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때 원단을 쓸 수 없으니 소재는 놓쳤는데, 그 부분에선 장난을 좀 쳤어요. 내시들이 철릭(綴翼 :일종의 포(袍)로 지금의 두루마기 형태다. 왕부터 낮은 신분까지 두루 입었다)을 입고 있는데 일하는 내시들의 작업복이니까 데님으로 해봤어요. 원래 데님이 미국에서 작업복으로 시작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소재는 바꿨지만 옷의 성격이나 형태는 조선 초기로 간 거죠.”

영화 의상은 배우가 아닌 캐릭터가 요구하는 옷
-보통 어떻게 작업을 하나요.
“시나리오를 봐야죠. 많은 정보가 있어요. 감독님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시나리오를 쓰니까 의도하건, 하지 않건 시나리오 안에 색이나 형태에 대한 묘사를 흘려요. 박찬욱 감독님의 경우엔 ‘올드보이’에 격자무늬란 단어가 많았어요. 지문에서 힌트를 많이 얻죠.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하니까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님과 얘기하고, 캐스팅된 배우를 보고 다 조합해서 유추해요.”

-시나리오에 구체적으로 의상이 명시되기도 하나요.
“감독님이 색상을 지명할 때도 있고, ‘친절한 금자씨’에선 물방울무늬가 시나리오에 명시돼 있었어요. ‘감독님 왜 물방울이에요’ 하고 물었더니 ‘꼭 그렇게 안 해도 된다’면서 그냥 촌스러웠으면 좋겠대요. 그럼 금자가 촌스러워야 하는 거지 꼭 물방울무늬 옷을 입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저는 그걸 간파하는 거죠.”

-의상은 캐릭터만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것 같습니다.
“작업을 포스터에서 시작해요. 영화의 이미지를 한번에 보여주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접하니까 포스터 이미지를 생각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만추’가 기억에 남아요. 제가 한 다른 영화들은 방에 포스터를 붙여놓을 수가 없어요. 세잖아요. 그런데 만추는 훈남훈녀가 나오니까 그런 이미지로 가야겠다 하는 식이죠.”

-배우도 변수가 되지 않나요.
“의상이 확 바뀔 때도 있어요. 꼭 이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데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안 어울리면 어떻게 좀 해보라고, 캐릭터 좀 만들어 보라고 할 때도 있어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모던보이’는 20세기 초 복식이고, ‘고지전’은 군복이잖아요. 작업하는 의상의 폭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깊이가 얕아요. ‘고지전’ 얘기를 하면, 전 군인이 나온 영화를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한국전쟁을 공부하고 전쟁에 대해 조사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다녔어요. 살아계신 참전 군인들이 기억하는 얘기를 듣고, 수기·사진·신문 자료 다 뒤지는 거죠. 모르는 것 하나하나를 리서치부터 시작해서 쌓는 거예요.”

-일상복은 어떤가요. 참고할 문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려워요. ‘괴물’의 캐릭터들. 너무 평범하잖아요. 자료를 찾는 것도 아니고 현재의 모르는 사람들을 그리는 게 훨씬 어려워요.”

-촬영이 끝나면 옷은 어디로 가나요.
“버리기도 하고, 아프리카에 보내기도 하고, 배우가 기념으로 갖기도 하고, 경매도 해요. 제가 보관하기도 하는데, 그건 남들이 안 가져간 거?(웃음) 이런 얘기 하면 다들 허탈해 하죠.”

-그래도 애착 가는 옷이 있을텐데.
“작업한 옷은 전부 필름 안에 남잖아요. 그걸 위해 만들어진 옷이에요. 의상 경매를 하면 옷을 산 사람이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너무 안 어울려요. 배우를 위한 옷이고, 역할 때문에 만들어졌으니까 영화 밖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특별히 옷에 애착이 없는데, 그게 매력적인 부분이에요. 연극도 그래요. 조명을 계산하고 만든 옷이기 때문에 무대에서나 빛을 발하지, 막을 내리고 배우가 분장을 지우면 옷은 사라지는 게 맞아요.”

-영화 의상은 뭘까요.
“캐릭터가 요구하는 옷이라고 생각해요. 조여정이 아니라 화연이가 입는 옷, 이영애가 아니라 금자가 입는 옷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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