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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밀입북이 통일운동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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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상현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조선 후기 순조 때 방랑 시인 김삿갓을 모티브로 했던 라디오 단막극이 ‘김삿갓 북한 방랑기’란 프로그램이다. 1964년 4월부터 2001년 4월까지 무려 37년간 1만1500회 방송된 역대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지난 3월 말 북한에 불법적으로 들어간 뒤 100일 넘게 친북 행보를 펼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노수희 부의장을 보노라면 김삿갓 방랑기가 연상된다.

  김삿갓은 방방곡곡을 떠돌며 민초들의 애환을 가슴 아파하는 풍자시를 남겼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는 이런 모티브를 살려 김삿갓이 북한 동포들의 고통을 한탄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노수희는 북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정반대로 김정일·김정은 체제를 찬양했다.

 그는 김일성의 평양 만경대 생가와 주체사상탑 등 체제 선전물을 대부분 참관했다.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참배하고 김정일 영정에 화환도 바쳤다. 방북 체류 중 그가 내뱉은 말과 행동은 친북·종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어지럽히는 수준으로까지 치달았다. 김일성 생가에서는 방명록에 “국상 중에도 반인륜적 만행을 자행한 이명박 정권 대신 사과하러 왔다”는 글을 남겼다. 평양 개선문에서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또 북한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아이들이 우리 대통령과 미군의 인형을 때리고 되돌아오는 놀이를 함께 보며 손뼉을 치고 즐거워한 것으로 북한 관영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노씨가 가는 곳마다 북한 당국의 기록영화 촬영팀이 따라다닌 점이다. 북한이 노수희의 찬양을 이른바 ‘우월성 선전’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을 찬양하고 우리 체제를 부정하는 그가 4월 총선 야권연대 공동선언에 참석했던 인물이란 점은 놀랍다. 노수희와 유사한 대북 인식과 성향을 가진 인물이 국회와 정치권에 거점을 마련하게 된다면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회의원이 되면 우리 군의 작전계획, 전력 증강 계획 등 각종 기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해진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을 십분 활용해 우리만의 일방적인 군비 감축과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와 같은 국가안보를 도외시한 이념 논쟁을 야기할 우려도 있다. 국민에게 소중한 한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라면 국가 정체성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유권자인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야지 북한을 대표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해선 안 될 것이다.

 1989년 문익환 목사를 필두로 2005년 10월 노동당 창건 기념일에 맞춰 평양에서 원정 출산을 하고 돌아온 통일연대 황선 대변인, 재작년 한상렬 진보연대 고문에 이르기까지 몇몇 인물들이 ‘통일운동’을 내세워 밀입북을 감행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마치 대한민국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 게 ‘통일운동’인 양 여기는 듯했다.

 노수희도 이들처럼 오늘 판문점으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노씨의 귀환계획을 전하면서 “노 부의장의 방북은 같은 민족으로서 응당한 예의”라는 주장까지 했다. 서울에서 이런 기자회견을 하는 시각 북한의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같은 내용의 이른바 범민련 공동보도문을 내놓은 걸 보면 노수희 귀환을 위한 각본을 치밀하게 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당국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 체제 선전에 이용할 것임에 틀림없다.

 관계당국은 노씨가 국가보안법상의 잠입·탈출과 고무·찬양 행위를 저지른 만큼 귀환하는 대로 긴급 체포해 조사할 방침이라고 한다. 정부는 엄정한 법 집행으로 노씨의 법질서 문란행위와 김정은 체제 찬양 행보가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다.

박상현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