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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 줄이 무서워진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74호 27면

“송길원 목사님께. 지난번에 전화로 인사 나누었던 월간 페이퍼의 김원입니다. 어제 보내주신 자료들 잘 받아보았습니다. 제가 이틀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기뻐하라∼베풀어라’의 글씨는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현재 그 네 마디의 말씀과 같은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그와 같은 삶을 살지도 못하면서 그런 글씨를 쓰게 된다면 그 글씨에는 뻐근한 생명력이 담길 수 없다는 걸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그 말씀을 글로 옮겨 적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삶과 믿음

캘리그라피(손으로 쓴 글씨)를 부탁했을 때 돌아온 긴 문자메시지였다. 답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보겠다는 결심과 각오로 쓰셔도 글에는 혼이 담길 터인데…하지만 존중하며 그날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네 마디’란 내가 쓴 졸시(拙詩) ‘내 영혼이 세상 일로 여위었다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도하라. 마지막 소원을 비는 것처럼/감사하라.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처럼/ 기뻐하라.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베풀어라. 하늘천사인 것처럼/ 그리하여/ 기도가 호흡이 되고/ 감사가 일상의 언어가 되고/ 기쁨이 춤이 되고/ 선한 일이 네 삶의 유전자가 되게 하라.”

그냥 쓰기만 해도 될 터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유안진 시인의 ‘겁난다’라는 시를 떠올리게 됐다.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呼訴)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口號)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도 도마뱀 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 자 한 자씩 써나간다/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무모한 육필(肉筆)이란 말이지/ 몸부림쳐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이 시를 놓고 시인 권혁웅은 “땅속의 지렁이는 한 일(一)자밖에 못 쓴다. 두 번 쓰면 두 이(二), 세 번 쓰면 석 삼(三), 그 위를 가로지르면 임금 왕(王)자다. 배로 쓴 글이어서, 글자 하나 쓰려면 황토 종이를 다 먹어 치워야 한다. 민달팽이는 제가 쓴 글 위에 눈물을 뿌린다. 반짝이는 상소문이다. 연애를 해도 잘했을 것이다. 이게 다 육필이란다. 그걸 찾아낸 시인의 안목이 더 대단하다”고 했다.

말 그대로 글 한 줄이 무서워졌다. 글이란 게 본디 남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고난 주간의 토요일 아침, 자신의 교회 주보를 들여다보던 목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주일 설교 제목인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아래 쓰인 이름 때문이었다. ‘윌리엄 쿠퍼’. 설교 제목 밑에 새겨지던 설교자의 이름, 그런데 예수를 죽인 자가 자기 자신이라니….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십자가 사건을 믿지 못한 채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순간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비록 손글씨를 받아내진 못했지만 난 내가 쓴 글이 적어도 육필(肉筆)이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배울 수 있었다.



송길원 가족생태학자.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로 일하고 있다. 트위터(@happyzzone)와 페이스북으로 세상과 교회의 소통을 지향하는 문화 리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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