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 엔진’마저 꺼지나 … 아시아 증시 급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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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재정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고용지표마저 부진하게 나타나자 일본 닛케이지수는 지난해 12월 이후 5개월여 만에 8300포인트 아래로 내려갔다. 일본 도쿄에서 한 투자자가 증시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도쿄 로이터=뉴시스]

“이번 유럽 재정위기는 1929년 대공황에 버금가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4일 세계 경제에 대해 크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이날 금융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이같이 말하며 “위기 대비 태세를 한층 강화해달라”고 주문했다. 김 위원장이 세계 경제 위기론을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8월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시장이 급변하기 전인 2011년 초부터 “위기가 장기화할 것”이라며 은행권에 외화 유동성 확보를 강하게 주문해 ‘족집게’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강도가 더 세졌다. 그는 “그리스에서 시작한 유럽 재정위기가 유럽 주변국(그리스)에서 중심국(스페인)으로, 재정위기에서 은행위기로 확산하고 있다”며 “특히 스페인 경제 규모는 그리스의 5배로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의 정도가 예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의 우려대로 이날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출렁였다. 지난주 중국 제조업 경기가 하강 조짐을 보인 데다 회복 조짐을 보이던 미국의 고용지표마저 예상보다 훨씬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주요국 증시들은 지난 주말 일제히 급락했다. 4일 개장한 아시아 증시도 ‘위기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다.

도쿄 닛케이지수는 지난해 12월 이후 5개월여 만에 8300포인트 아래로 내려갔다. 일본의 대표적 가전업체 소니는 전날보다 1.68% 하락한 996엔으로 마감했다. 소니 주가가 1000엔 아래로 내려간 것은 1980년 8월 이후 처음이다. 소니는 2000년 3월 1만6950엔까지 올랐던 일본 가전의 자존심이지만, 최근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깊은 슬럼프로 빠져들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소니 실적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미 고용지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한국 증시도 직격탄을 맞았다. 외국인 매도가 이어지며 코스피지수가 1800선 아래로 주저앉았다. 지난달 유럽 위기가 다시 불거진 이후 외국인이 국내 증시에서 빼내간 자금은 3조4000억원에 이른다. 달러당 원화가치는 전날보다 4.3원 하락해 다시 1180원대로 떨어졌다.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린 것에 비하면 선방한 편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이 정도로 주가가 빠지면 통상 달러당 원화가치도 급락하기 마련”이라며 “그러나 원화가치는 소폭 하락하는 데 그쳤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보다 원화의 체력이 단단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물경제 침체 우려에 유가도 크게 하락했다. 두바이유는 배럴당 94.32달러로 지난해 2월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물론 유럽·중국까지 세계 경제를 이끌 엔진이 일제히 꺼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많은 투자자가 최근 경제위기를 유럽 문제로만 인식해 오다가 미국은 물론 중국·브라질 등 주요 신흥국까지 휘청거리자 글로벌 위기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 사태만 해결되면 글로벌 경제위기도 극복할 것이라고 전망해 왔지만 그게 틀렸다는 방증”이라며 “유럽 문제 해결은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 해결의 충분조건이 아니고 필요조건일 뿐이라는 게 확인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큰 흐름이 바뀐 건 없다는 해석도 만만찮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지난해에도 세계 경제는 4분기에 성장률이 둔화하며 쇼크가 왔다가 이듬해 1분기에 반짝하고 되살아났다”며 “이런 흐름이 올해도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 총선 전까지 불안한 흐름이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월스트리트 저널도 “여름만 되면 찾아오는 금융시장 불안이 3년째 계속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권 실장은 “미봉책으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번 위기가 곧바로 파국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미라며 “계속 조금씩 꿰매온 상처를 그냥 터뜨릴 것이냐(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며 치료할 것이냐(유로존 재정 통합)의 갈림길에 섰다”고 진단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IHT는 이날 “유로 위기가 정책적인 용단이 계속 미뤄지면서 순리적 해결의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결속 강화냐 아니면 깨지느냐의 양자 택일만 남은 ‘진실의 순간’에 접근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시장 전망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권순우 실장은 “과거엔 이 정도 충격이면 외화 유동성 얘기가 나오면서 불안감이 컸을 텐데 이만하면 선방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비관론도 만만찮다. 신영증권 김세중 투자전략팀장은 “금융시장은 비교적 선방했지만 유럽 위기로 중국 경제가 부진해지고 덩달아 한국 수출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실물경제가 더 악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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