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과 조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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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호 18면

작년 아카데미 영화제를 휩쓸었던 영국 영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는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인 조지 6세의 실화다. 주연배우 콜린 퍼스는 말더듬이였던 조지 6세가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치료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부부의사가 쓰는 性칼럼

조지 6세는 조지 5세의 차남으로 원래 왕위 후계자가 아니었다. 장남 에드워드 8세는 세간을 들썩였던 로맨틱 스캔들로 왕위에서 물러났고, 동생인 조지 6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조지 6세는 어린 시절부터 말더듬이 심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말더듬은 기질적·환경적·심리적 요소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다. 문제는 또 그럴까 봐 불안해하고 증상을 억제하려 들면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이를 수행불안이라 하는데, 성기능도 수행불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에드워드 8세를 논하면, 후에 윈저공으로 불린 그는 미국 출신의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에 왕위를 포기한 세기의 로맨스 주인공이다. 사실 그에게는 숨겨진, 그러나 당시 영국의 사교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미남 바람둥이 에드워드 8세에게 심한 조루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둥이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조루 때문에 관계가 깊어질 때쯤이면 파트너를 바꿔버리는 심각한 성기능장애 환자였다. 그가 늘 술에 찌들어 살았던 이유 중엔 술이 사정중추를 억제해 일시적으로 조루증상이 덜해지기 때문일 수 있다.

최고의 독신남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미인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혼한 심프슨 부인을 택한 데는 자신의 열등감을 받아줄 만한 만만한 상대에게 편안함을 느꼈을 수 있다. 덧붙여 부담스러운 왕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당시엔 왕비로 결격사유인 이혼녀를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세기를 풍미한 조지 6세와 에드워드 8세, 이들 형제에겐 수행불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셈이다. 각각의 문제였던 말더듬과 조루 둘 다 수행불안이 발병과 악화의 주 요인이 될 수 있다. 엄격했던 아버지 조지 5세와 어머니 메리 왕비의 훈육방식에 큰아들의 조루, 작은아들의 말더듬이 더 나빠졌을 수 있다. 만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영국 왕위라는 직책은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스트레스가 심한 자리다. 조지 6세의 만성적인 말더듬도 야단치고 다그치는 부모의 서릿발이 당사자를 수행불안으로 빠뜨렸을 수 있다.

필자의 진료실엔 형제가 모두 지루나 조루, 발기부전 등으로 찾는 경우가 좀 있다. 개중엔 각자 비밀리에 왔는데 알고 보니 형제인 경우도 있고, 어느 한쪽이 치료받고 자신의 형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치료를 권하기도 한다. 흔히 가족들이 여럿 그렇다면 유전적 문제를 먼저 생각하지만, 이보다는 부모의 훈육 등 성장환경이 주는 악영향이 더 크다. 성관계 역시 인간관계이고,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인간관계의 기본을 배우기 때문이다.

조지 6세 형제에겐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크다. 필자의 시각엔 부담스러운 왕위를 벗어 던지고 도망간 에드워드 8세보다는, 자신의 말더듬을 고치기 위해 치료사를 찾아 각고의 노력으로 이겨낸 조지 6세에게 더 큰 격려와 찬사를 던지고 싶다. 비록 장애가 있었지만 두려움을 안고도 치료하려는 용기를 가졌고, 그렇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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