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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단성사' 첨단복합영화관으로 변신

중앙일보

입력

일제 강점기에 종로통을 주름잡았던 김두한은 단성사를 꺼렸다고 한다. 대신 인근의 우미관을 활동 중심지로 정했다. 왜? 단성사의 땅 주인이 일본인인 반면 우미관은 건물·땅 주인 모두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두한은 단성사에 크나큰 신세(?)를 졌다.

그의 용감무쌍한 활약을 다룬 영화 '장군의 아들' 은 1990년 단성사에서 68만명(서울관객)의 관객으로 당시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단성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2003년 여름 '시네시티-단성사' 로 거듭난다. 단성사란 이름은 간직하지만 지난 세기 한국 영화사와 동고동락했던 단성사의 고풍스런 건물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게 됐다.

"위치를 문의하는 전화가 숱하게 걸려와요. 손을 들 수 밖에 없지요. 젊은이의 발길이 끊어졌어요. " 정륭사 사장의 변(辯)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변화하는 극장환경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영화 제작.홍보자들은 개봉 당일 서울극장으로 몰려든다. 관객의 첫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서울극장이 서울의 대표극장으로 떠오른 때는 90년대 중후반. 일곱개의 상영관을 갖춘 복합영화관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8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단성사를 대관했던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90년대 초만 해도 극장하면 단성사였다" 며 "불과 몇년 새 세상이 확 달라졌다" 고 말했다.

그의 히트작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장군의 아들' 이 모두 단성사를 거쳐갔다.

'서편제' 가 93년 1백96일 동안 상영되며 1백만명 가까운 관객을 기록한 곳도 단성사. 단성사는 77년 '겨울여자' , 65년 '역도산' 등 해방 이후 우리 영화의 영광과 함께 했다.

세월을 거슬러가면 사연은 더욱 깊어진다. 단성사(團成社)란 이름부터 그렇다. 동대문 상인들이 '힘을 모아 뜻을 이루자' 는 차원에서 대한제국 시대의 연예계 쇄신을 도모했다.

퇴기(退妓)조합과 손을 잡고 각종 공연을 하면서 그 수익금을 고아원 등 사회시설에 기부하고,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중동학교 교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단성사의 전성기는 1918년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인 박승필씨가 단성사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한일합병 이후 놀고 있던 대학제국 시절의 군악대를 끌어들여 단성사악단을 창립하며 관객 개발에 나섰다.

현재 단성사 극장간판에 가려진 2층의 악단석에서 불어대는 소리는 멀리 서대문에서도 들렸단다. 당시엔 영화와 연극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아 단성사에선 신파류의 연극과 연속극 같은 영화(영화를 몇 차례로 나눠 상영)가 동시에 올랐다.

그러나 한국영화에 대한 박승필씨의 기여는 거의 '역사적' 이다. 그는 직원을 일본에 보내 촬영술을 배우게 하고, 카메라도 직접 구입해 한국영화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 (19년) 등 숱한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 극장 처음으로 하루 3회 상영, 심야 상영을 시도한 곳도 단성사였다.

박씨는 '아리랑' (26년)의 나운규를 실질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32년 1월 박씨가 사망했을 당시 극장측은 그를 기념해 하루를 휴관했을 정도. 그만큼 단성사는 일제의 문화정책 속에서도 한국영화의 맥을 잇는 보루로 우뚝 섰었다.

물론 영화 대부분이 변사의 설명을 곁들이는 무성영화였고 유니버설.파라마운트 등 할리우드 영화도 상영했다. 그러나 단성사는 박승필의 사망, 잇따른 경영난, 일제의 한국영화 말살정책 등에 따라 결국 39년 6월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당시 영화배급자였던 이구영씨는 "파란만장한 단성사의 일대기를 그 누가 눈물 없이 그릴 수 있으라 "라며 애도하기도 했다.

당시 단성사의 이름을 달고 마지막으로 상영한 작품이 '잃어버린 지평선' . 단성사는 해방과 함께 그 지평선을 되찾아 오늘에까지 이어왔다.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하지만 지난 한세기 동안 상영한 작품은 수천여편. 21세기의 새 지평을 찾아 변모하는 단성사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은 바로 이같은 한국영화의 영욕이 단성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과거를 일러주는 작은 기념관이라도 만들었으면….

▒단성사 풍경들

#1.1907년 6월 4일.
동대문 시장 상인들이 동대문 밖 영도사 대원암에 배우 등을 모아놓고 조선 연예계 발전 방안에 대해 연설. 연예인의 생활을 돕고 수익금을 교육.자선사업에 쓰겠다고 발표. 마침 근처 화동학교 운동회에 들렀던 고관들이 연예계의 단결을 격려하는 연설. 이후 여배우의 손을 잡았던 양반이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신문에서 비판을 받음.

#2.1918년 12월 21일.
'본관 신축 낙성 후 모범적 활동 사진을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란 제목의 신문광고를 냄. "겨울밤은 점점 길고 겨울에 대한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때 (이곳에 오면) 난로가 몸을 따뜻하게 하여 주고, 백설 같은 하얀 포장(스크린)엔 처음 보는 기기괴괴한 사건이 비칠 것이다."

#3.1926년 10월 1일.
나운규의 '아리랑' 신문광고. "현대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영화사의 신기록! 촬영 3개월간! 제작비용 1만5천원 돌파!" "눈물의 아리랑, 웃음의 아리랑, 막걸리 아리랑, 춤추며 아리랑…. " 예나 지금이나 영화 광고는 대단.

#4.1939년 1월 10일.
"경성의 유수한 영화상설관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성사가 시세의 급격한 변화와 대자본의 공세에 밀려 경영 곤란에 빠지게 됐다." 단성사의 경영상 어려움을 알린 언론 보도. 할리우드의 대공습과 한국영화의 기업화가 특징인 요즘과 비슷? 그해 7월 극장을 인수한 일본인 이시바시(石橋)가 새 이름을 공모하자 조선 각지에서 2만4천여 건이 접수됨. 결국 대륙극장으로 개명.

#5.1999년 2월 2일.
스크린 쿼터 축소문제가 한.미 투장협정의 쟁점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리처드 피셔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가 한덕수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함께 단성사에서 '미술관 옆 동물원' 을 관람. 한국영화의 상징으로 단성사를 방문했던 것.

#6.2001년 1월 16일.
스크린 11개를 갖출 대대적 재건축 계획 발표. 이튿날 단성사 2층의 외진 사무실에서 만난 근속 35년여의 조상림.이만봉 상무,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정리한 옛 기록을 보여주며 "한국영화의 1번지란 이름만 믿고 어깨에 힘만 줬다. 변화가 너무 늦었다" 고 저간의 아쉬움을 토로.

#7.2003년 여름.
첨단시설 멀티플렉스로 재단장한 '시네시티 단성사' 개관(사진). 지하 5층을 포함해 17층 건물 가운데 영화관은 3층부터 10층까지. 지상 1, 2층엔 패스트푸드점.은행 등이, 그리고 11, 12층엔 스카이 라운지가 들어선다. 7백80석 규모의 대극장 두 개. 하나는 한국영화 전용관. 2백석 규모의 소극장 세 개는 예술성이 높은 영화를 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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