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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설 만드는 어린이문화예술학교

중앙일보

입력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시인이 쓴 '설날 아침에' 의 첫 부분입니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서울 정릉3동 영락모자원을 찾았습니다.

여느 해보다 몸과 마음이 썰렁하기에 올 설을 따스하게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습니다. 밖에선 살을 에는 칼바람이 휑하게 불어대지만 모자원의 작은 강당에선 아이들의 깔깔거림이 세상의 근심을 잊게 합니다.

고작해야 대여섯 평의 강당에 10여 명의 초등학생이 모여 연극놀이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비영리문화예술단체인 어린이문화예술학교(대표 김숙희.성균관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에서 파견 나온 선생님의 손짓.몸짓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따라하다가, 우스운 장면이 나오면 하얀 이를 드러내고 흐드러지게 웃어댑니다.

간혹 자기들끼리 부딪치면 성을 내며 다툴 듯하다가 '그러면 안돼요' 라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이내 악수를 청합니다.

선생님들은 인형극 소품을 갖고 왔습니다. 꼬마들은 애벌레.개미.베짱이.무당벌레.나비 등 형형색색의 인형을 보고 꽤나 들뜬 모양입니다.

"나는 개미가 좋아요" "나비를 주세요" 라며 우르르 달려듭니다. 갑자기 몰려든 아이들에 당황한 선생님이 '얼음' 을 외칩니다. 아이들은 얼어붙은 것처럼 순식간에 동작을 멈춥니다.

시끌벅적했던 자리가 다소 정돈되자 놀이는 계속됩니다. 각기 인형들에게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인형에 맞게 이런저런 얘기도 만들어봅니다.

'조각상 놀이' 도 재미있습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란 노래에 맞춰 춤추다 선생님이 '○○○' 하고 외치면 그 모양을 만들어내는 게임입니다.

선생님이 '눈사람' 을 말하자 아이들은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모으고 허리를 조금 낮춰 눈사람 비슷한 형상을 연출합니다.

'꽃' 을 외치자 두 손을 모아 턱밑을 받치고는 손가락으론 양볼을 지긋이 눌러봅니다.
좁은 강당은 이내 꽃밭이 됩니다.

영락모자원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생활보호 대상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이혼.사별 등으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갈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성의 자립을 돕는 사회복지시설이지요. 이런 모자원이 서울에 8곳, 전국엔 37곳이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들이 생업을 위해 낮을 비우는 사이에 아이들을 돌보는 채행옥(사회복지사) 씨는 "이곳 아이들은 겉보기엔 예쁘고 발랄하나 마음의 상처가 있는 까닭에 때론 폐쇄적이거나 혹은 공격적 성향을 보이곤 한다" 고 합니다.

서로 가슴을 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달라졌다고 합니다. 함께 얘기하고 함께 율동하는 연극놀이를 통해 상대를 배려하려는 마음씨를 배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채씨가 말을 잇습니다 "아이들이 연극 연습이 있는 월.수.금요일을 너무 기다려요. 정말 좋아들 하죠. 연습이 끝나면 모두 불그스레한 얼굴로 간식을 달라고 보채기도 해요. "

연극을 지도하는 어린이문화예술학교의 이런 활동이 추운 사회를 따스하게 합니다.

1998년 여름 서울 SOS 어린이마을에서 시작해 해마다 여름.겨울방학을 이용해 어린이.청소년 복지시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영락모자원은 그 프로그램의 일곱째 경우입니다. 주최측은 연극놀이 과정이 끝나면 번듯한 상업극장에서 아이들이 그동안 연습했던 내용을 자랑할 수 있는 공연기회도 마련합니다.

김숙희 대표는 "협동심을 키우고 자신감을 키우는 데 연극만큼 교육적 효과가 뛰어난 수단은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연 자체보다 무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거든요. 연극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울 수만 있다면…" 하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한번 행사에 평균 1천만원이 소요되나 모든 비용을 주최측이 대던 초창기와 달리 요즘은 개인.단체들의 후원이 있어 부담이 다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두 명이 조를 이뤄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가게놀이' 에 즐거워하는 박지혜(초등학교 4학년) 양에게 "연극 놀이가 재미있나요" 라고 물어봤습니다.

대답이 일품입니다. "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어 좋아요. " 옆에 있던 3학년생 의진이를 가리키며 "제는 매일 언니들에게 대들었는데 연극놀이를 한 뒤에는 우리 말을 잘 따라서 예뻐요" 라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자기를 열고 서로를 돕는 공동체 의식을 조금씩 조금씩 익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락모자원 아이들에게 올 설날이 평소보다 따뜻해지기를 희망합니다.

부모가 있는 가정보다 차례상이 푸짐하지 않고, 또 세뱃돈을 적게 받더라도 친구와 연극이 있어 덜 외로운 설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들도 모두(冒頭) 의 시인이 읊은 것처럼 "어린 것들 잇몸에 고운 이를 보듯 새해를 그렇게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가정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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