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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들의 컴백… 90세 감독이 경쟁부문 진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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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08면

올 칸 영화제 최고 화제작이었던 ‘사랑(Amour)’의 제작진. 노배우와 노감독의 노익장으로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왼쪽부터 주연배우 에마뉘엘 리바, 미하엘 하네케 감독, 주연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과 이자벨 위페르. 리바와 트랭티냥은 각각 85세와 82세이고 하네케 감독은 70세다. [칸(프랑스) 신화통신=연합뉴스]

휴식을 모르는 노장 감독들, 백발이 성성한 그들의 실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에서 열린 제65회 칸 국제영화제가 12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27일(현지시간) 폐막한다. 한국시간으로 28일 새벽이면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와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등 한국 영화 2편이 포함된 경쟁 부문의 수상 결과를 알 수 있다. 올해 칸을 뜨겁게 달궜던 가장 큰 이슈는 노(老)거장들이 건재한 위상을 과시했다는 점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노장의 연륜과 삶의 성찰이 묻어난 수작들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다.

오늘 막 내리는 제6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22편 중 5편이 70세 이상 감독의 작품이었다. 이들 중 3명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이미 한 번씩 받았다. ‘사랑’의 미하엘 하네케(70), ‘라이크 섬원 인 러브’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72), ‘천사의 몫’의 켄로치(76) 등이다. 예술영화계의 ‘레전드(전설)급’ 거장들이 한데 모인 ‘별들의 전쟁’이라 할 만했다. 경쟁 부문 외에도 노장의 작품들이 즐비했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는 “올해처럼 칸에서 세계적인 거장들이 이렇게 세(勢)를 한꺼번에 과시했던 적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 중 하네케 감독이 만든 ‘사랑’은 영화제 내내 최고 관심거리였다. 80대 노부부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드라마에 관객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감독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장루이 트랭티냥(82)과 에마뉘엘 리바(85), 주름살 가득한 두 노배우의 열연과 딸 역을 맡은 이자벨 위페르(59)의 안정감 있는 서포트가 감독 특유의 절제미를 돋보이게 했다.

칸에서 만난 김동호(75)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도 “아무래도 내 나이가 있어서인지 하네케 감독의 ‘사랑’을 가장 인상적으로 봤다”고 말했다. 하네케는 전체주의에 대한 끔찍한 우화를 흑백으로 담은 ‘하얀리본’으로 3년 전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언론 평가도 높다. 현지 전문가 평가의 바로 미터인 영화전문지 스크린인터내셔널 10인 평가단이 4점 만점에 3.3점을 매겼다.

‘사랑’은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비욘드 더 힐스’(3.3점)와 함께 공동 1위를 유지하며 폐막을 하루 앞둔 26일 현재까지 황금종려상 최유력 후보다. 하네케에 비하면 문주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다. 그는 2007년 30대의 ‘어린’ 나이에 황금종려상을 받아 세계영화계의 변방국가 루마니아를 영화인들의 가시권에 띄워 올렸다.

70세는 올해 칸에서 젊은 축에 속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의 알랭 레네(프랑스)는 하네케 감독보다 무려 20년이나 위인 90세다. ‘히로시마 내 사랑’ 등을 통해 실험적 화법을 선보인, 세계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한 명이다. “미국에 클린트 이스트우드(82)가, 포르투갈에 최고령 현역 감독인 마누엘 데 올리비에라(104)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레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꼽히는 예술인이다. 200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았던 그가 올해 경쟁 부문에 오른 걸 두고 칸 관계자는 “미국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전설의 투수가 마운드로 돌아와 월드시리즈 경기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라고 비유했다.

‘천사의 몫’의 켄 로치(영국) 감독은 칸 경쟁 부문에 11번째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70세의 나이에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으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그는 이번엔 자신의 손자뻘인 20대 청춘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다. 암울한 경제상황 속에서도 가정을 이루려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일탈, 그리고 재기를 유머와 풍자를 통해 스크린에 담았다. 공허한 시대, 고뇌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일갈하는 듯했다. “칸 영화제를 가장 즐겁게 해준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켄 로치(2.8점), 알랭 레네(2.6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2.4점) 등 노장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점은 22개 작품 중 상위권으로 이들의 수상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코즈모폴리스’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캐나다)는 노장 중 막내급이다. 이제 막 일흔 줄에 접어들었다.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 등 도발적인 영화세계로 ‘악명’을 날린 그는 로버트 패틴슨, 쥘리에트 비노슈, 폴 지아마티 등 유명 배우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했다.

공식경쟁 외 다른 부문에서도 많은 노장 감독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했다. ‘테레즈 데케루’의 클로드 밀러 감독은 올해 4월 4일 70세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칸 영화제가 그의 유작을 폐막작으로 선정한 건 노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다.

‘마지막 황제’ ‘몽상가들’로 유명한 이탈리아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71) 감독은 비경쟁 부문에 ‘미 앤드 유(Me and You)’ 를 출품했다.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72)는 3D(3차원)로 제작한 ‘드라큘라’를 심야 상영작으로 내놓았다. 그는 영화에 출연한 자신의 딸 아시아 아르젠토(36)의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밟아 눈길을 끌었다. 비경쟁 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11월 25일 미시마가 자기의 운명을 선택한 날’을 내놓은 와카마쓰 고지 감독도 1936년생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B급 영화의 대가다. 그는 영화에서 ‘금각사’ 등으로 유명한 극우파 작가 미시마 유키오(1970년 자살)의 마지막 순간을 그렸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노장 감독들이 올해 칸 영화제에서 빛난 이유는 단지 이들이 노장이라서가 아니라 관록으로 쌓은 개성과 철학을 영화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 칸 영화제를 달군 또 하나의 이슈는 공식 경쟁 부문에 여성감독이 전무했다는 이유로 여성단체와 여성영화인들로부터 “성차별적 영화제”라는 비판을 받은 점이다. 이들은 “2010년 경쟁 부문에도 여성 감독의 작품은 한 편도 없었다”며 영화제 집행위를 비판했다. 프랑스 여성단체 회원 5명은 20일 하네케 감독의 ‘사랑’ 공식상영 레드카펫 위에서 얼굴에 가짜 턱수염을 붙인 채 항의시위를 벌였다. 개막 전에는 일간지 르몽드에 영화제의 성차별을 비판하는 프랑스 여성영화인들이 성명을 냈다. 논란이 거세지자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성별에 의해 초청작을 선정하지는 않는다”며 반박 성명을 내기도 했다.

9명의 영화제 심사위원 중 여성이 4명을 차지한다는 점이 칸 영화제의 성차별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을 안겨준 대목이었다. 그리고 문주 감독의 ‘비욘드 더 힐스’, 울리히 자이들 감독의 ‘파라다이스: 러브’,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등 여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영화가 많았다는 점도 이들에게는 위안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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