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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던 영화관 사업, 멀티플렉스로 살려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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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28면

블룸버그뉴스

1996년 4월 국보급 미국 배우 말런 브랜도(2004년 별세)는 유대인 래리 킹이 진행하는 CNN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유대인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MGM을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인이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전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인기 배우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유대인 문제를 들먹이며 미국 사회의 오랜 금기를 깼다는 점에서 브랜도는 한동안 구설에 휘말렸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미 영상 미디어 대부 섬너 레드스톤

유대인이 할리우드 6대 메이저 영화사 설립
유대인은 초기 할리우드 7대 메이저 영화사 중 디즈니를 제외한 6개사를 설립했다. 독일 태생 의류상 칼 래믈은 1912년 유니버설, 헝가리 농촌 출신 잡화상 아돌프 주커는 1914년 파라마운트, 헝가리 태생 세탁소 주인 빌모스 푹스(윌리엄 폭스로 개명)는 1915년 폭스(현 20세기 폭스)를 각각 세웠다. 벨라루스 태생 주류상 루이스 메이어와 폴란드 태생 모피상 새뮤얼 골드윈은 1922년 동업으로 MGM, 전차기사 출신 독일 유대인 해리 콘은 1924년 CBS(현 컬럼비아), 그리고 폴란드 태생 털옷 장사 히르쉬 본살(해리 워너로 개명)은 1925년 동생들과 함께 워너브러더스를 각각 창업했다. 모두 문화·예술 분야의 교육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자영업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가 장래 수익성 있는 오락 산업으로 발전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후 이들 영화사의 경영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대체로 유대계 자본에 의해 운영됐다. 섬너 레드스톤(사진)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미국 영상 미디어계의 대부로 떠올랐다.

레드스톤은 1923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독일 유대인 가계다. 원래 성인 독일어 로트슈타인(Rothstein·붉은 돌이란 뜻)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아버지는 보스턴 외곽 데드햄에서 영화관을 경영했다. 머리 좋고 공부도 잘한 레드스톤은 보스턴 라틴스쿨(고교)을 졸업한 후 하버드대 학부과정을 마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병으로 육군에 입대해 군사암호반에서 일본군 암호 해독업무를 맡았다. 하버드 시절 일본어와 한자를 조금 배운 게 도움이 됐다. 종전 후엔 조지타운대와 하버드대 법대를 다녔다. 하버드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학업 후 연방 국세청에 잠시 근무했지만 곧 가업인 극장 일을 맡으면서 미디어 사업에 진출했다.

80년대 초가 되자 전 세계적으로 영화관 사업은 사양기를 맞았다. TV의 영향 때문이다. 레드스톤은 이제 단일 상영관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게 바로 ‘멀티플렉스’다. 한 극장 단지에 5~10개의 개봉관을 만들어 관객들의 관람영화 선택권을 넓혔다. 지금은 우리를 위시해 세계적으로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대세지만 당시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레드스톤은 이렇게 망해가던 미국 영화관 사업을 다시 일으켰다.

이후부터 영상미디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80년대 중반 그는 CBS방송 자회사인 비아컴 인터내셔널을 인수했다. CBS는 1927년 우크라이나 태생 유대인 윌리엄 페일리가 설립한 미국 3대 지상파 방송 중 하나다. 다른 두 개 방송인 ABC·NBC도 유대인이 창업했다. 비아컴은 CBS 방영 프로를 배급, 수출하는 회사였다. 레드스톤의 야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비디오 대여점 체인 블록버스터와 케이블 TV 10여 개 채널(음악방송 MTV, 어린이 방송 니켈로디온 등)을 매입했다. 93년엔 CBS 방송과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인수해 비아콤 산하에 두었다. 유대계 대형출판사 사이먼 앤드 슈스터와 인터넷 커뮤니티 네오펫도 그룹에 합류했다. 2005년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설립한 드림웍스 영화사의 주력 지분을 확보했다. 현재 레드스톤의 기업군 대부분은 내셔널 어뮤즈먼츠라는 지주회사에 통합돼 있다. 이제 그는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루퍼트 머독과 쌍벽을 이루는 미디어의 총수가 됐다.

레드스톤은 영상 매체의 핵심은 콘텐트란 지론을 편다. 그래서 콘텐트 개발의 기재로 알려진 여류 유대인 영화 제작자 셰리 랜싱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라마운트 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녀의 주도로 여러 개의 대작이 나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브레이브 하트’ ‘타이타닉’ ‘포레스트 검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은 영화제 수상과 함께 흥행에도 대박을 친 파라마운트사 제작·배급 영화들이다.

리버럴 경영 회의는 적게, 할 땐 자유토론
풍기는 인상은 다소 권위적이지만 레드스톤은 많은 유대 기업인처럼 리버럴한 경영 방식을 선호한다. 특히 독특한 회의 방식으로 정평이 있다. 가급적 회의를 적게 하지만 꼭 할 때는 자유 토론식으로 진행한다. 참석자 모두가 계급을 떠나 난상토론을 하게 만든다. 토론 중 도출된 다양한 아이디어를 사업 집행에 반영시킨다.

우리 사회에서 회의는 공직이건 기업이건 모두 주재하는 상급자의 권위를 확인하는 시간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결정을 앞두고 자신이 없어 불안한 상급자에게 확신을 갖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회의 시간도 길다. 새벽같이 시작한 회의가 어떤 때는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끝난다. 대체로 주재자가 발언을 독점하며 간부나 직원을 돌아가며 질타한다. 지도는 아예 없고 편달 위주다. 유교적 가부장 전통이 그대로 투영된 전형적인 우리 회의 문화다. 결국 부하들도 피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식의 회의 방식으로 창의성과 효율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많은 유대 기업의 고속 성장 이면엔 자유로운 토론을 중시하는 창의적 회의문화도 한몫하고 있다는 점을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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