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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대 체질이죠, 검객 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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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남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이 18일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도중 당당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오은석·원우영·구본길·김정환. 한 달 뒤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최종 엔트리가 확정되면 이 중 한 명은 예비선수로 밀려난다. [김도훈 기자]

그동안 한국 펜싱의 ‘적자(嫡子)’는 플뢰레였다. 한국 펜싱이 올림픽에 첫선을 보인 지 16년 만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적자의 탄생 무대였다. 남자 플뢰레 대표였던 김영호(41·로러스 펜싱클럽 총감독)가 한국 펜싱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여자 플뢰레의 간판 남현희(31·성남시청)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여자 펜싱 사상 첫 메달인 데다 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베잘리(이탈리아)와 1점 차 명승부를 연출하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한국 펜싱=플뢰레’라는 공식이 굳어져 갔다.

 그러나 최근 ‘적자’ 자리를 위협하는 ‘서자(庶子)’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호성적을 바탕으로 세계 정상권으로 급부상한 남자 사브르 대표팀이다. 그동안 플뢰레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지만 세계랭킹 3위 구본길(23·국민체육진흥공단), 4위 원우영(30·서울메트로), 오은석(29)·김정환(29·이상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4명의 주축선수들이 고른 성적을 올리며 새로운 올림픽 유망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14일(한국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월드컵 단체전에서 세계 1위 러시아를 꺾고 정상에 오르는 등 개인전에 더해 단체전 성적까지 상승일로다.

 18일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남자 사브르 팀의 분위기는 투명 마스크에 비치는 밝은 표정이 보여주고 있었다. 주장 원우영과 막내 구본길은 7살 차이지만 나이차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잘 어울렸다. 체력 부담 때문에 개인전에 비해 소홀히 여겼던 단체전도 팀워크가 단단해지면서 경쟁력을 갖게 됐다. 단체전만 나가면 긴장했다던 구본길도 선배들의 조언 덕에 “우리 팀엔 약점이 없다. 이젠 단체전이 더 편하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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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비인기 종목인 펜싱, 그중에서도 음지인 사브르 선수로 뛰면서 흔들린 적도 있었다. 야구선수 출신인 김정환은 “마운드에 서 있는 모습을 꿈꾼 적이 많다”고 했다. 원우영은 중학교 때 경쟁이 치열한 플뢰레에서 사브르로 종목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사브르를 선택한 데 대해 후회는 없다”는 게 모두의 결론이다.

 아테네·베이징 올림픽에 연속 출전한 오은석을 빼면 다들 올림픽 첫 경험이다. 그러나 선수들에게 런던이란 부담감이 아닌 자신감을 의미하는 공간이었다. 자신들을 ‘무대 체질’이라고 소개할 만큼 실전에 강하기 때문이다. 상위권 선수들의 기량 차가 크지 않고 당일 컨디션과 심리 상태에 많이 좌우되는 종목 특성상 기존 대회보다 더 나은 성적, 금메달까지 기대한다.

 가족보다 친하다는 남자 사브르 4총사의 마지막 고비는 한 달 뒤로 예정된 최종 엔트리 확정 순간이다. 4명 중 1명은 예비선수로 밀려나지만 다들 고른 성적을 올렸기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따라서 선수들은 누가 나가더라도 자신이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한 명의 희생 속에 등장할 사브르 삼총사는 7월 말 런던에서 4명 몫의 칼을 겁 없이 휘두를 것이다.

글=정종훈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사브르=머리와 상체(양팔 포함)를 공격할 수 있는 종목. 플뢰레는 몸통, 에페는 전신 공격이 가능하다. 찌르기만 가능한 플뢰레·에페와 달리 베기·찌르기 모두 유효하다. 개인전은 3분 3라운드, 단체전은 3명이 3분 1라운드씩 세 차례 겨뤄 총 9라운드를 치르는 방식이다. 개인전은 15점, 단체전은 45점을 먼저 얻으면 경기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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