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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평] 문어의 세계를 바라보는 두 시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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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시청자들은 우리나라 방송사와 세계적인 제작사의 자연다큐멘터리를 비교 감상하는 흥미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SBS TV와 KBS 1TV가 5일 밤과 7일 새벽 문어의 생태를 담은 국내외 프로그램을 잇따라 방송한 것이다.

상대방 프로그램의 김을 빼려는 고질적인 방송사간 대응편성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중다큐 전문 카메라맨과 세계 정상급 다큐멘터리 채널의 연출자의 수준과 시각 차이가 잘 드러나 방송사들로서도 소중한 체험이됐다.

두 프로그램에서 현란한 수중쇼를 화면 가득히 펼쳐보인 문어는 우리가 흔히 어물전이나 식탁에서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카멜레온보다 더 빠르게 몸 빛깔을 바꿔내는 위장술, 단번에 예리한 바닷가재의 집게발을 무력화시키는 날렵한 사냥술,좁은 바위 틈을 물흐르듯 빠져나가는 유연한 몸 동작, 고성능 접착제를 방불케하는 흡착력을 지닌 빨판 등은 '바다의 포식자'라는 그의 별명을 무색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SBS TV가 5일 오후 10시 50분에 방송한〈문어의 모정〉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있듯이 문어의 모성본능에 앵글을 맞췄다. 생명의 신비와 생태계의 질서가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는 대목이 동물의 번식과정인 만큼 주변의 곁가지는 과감히 잘라냈다.

천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어는 으슥한 바위 틈에 산란을 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약자의 길을 택해 50일 동안이나 알을 끌어안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문어를 보자마자 도망가기에 바빴던 놀래미와 자리돔 따위가 겁없이 문어의알을 훔쳐내고 한입거리도 안될 법한 고동도 문어의 산란장 옆에 붙어 포식을 즐긴다.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문어의 부화광경. 껍질을 벗고 수면을 향해 헤엄치는 수많은 새끼들, 이들을 좀더 멀리 보내려고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바람을 불어내는 어미, 주변에서 이를 먹어치우는 물고기들… 새 생명 탄생의 순간은 축복의 현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고해(苦海)였다.

산란에서 부화에 이르는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제작진이 만났던 세마리의 문어가 모두 새끼를 부화시킨 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한 마리는 다른 문어의 침입에 맞서 싸우느라 새끼를 절반도 채 부화시키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재작년 봄부터 제주도 서귀포 앞 문섬의 바닷속을 드나들며 진기한 장면을 포착한 수중다큐 전문가 장원준씨의 촬영술과 끈기도 놀랍거니와 아기자기한 눈요깃거리를 제쳐두고 확실한 메시지에만 집중한 정병욱 PD의 기획력도 높이 사줄 만하다.

시청자들은 자연다큐로는 이른바 '대박급'인 13.4%의 시청률로 제작진의 노고에 보답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이 프로그램의 허점은 KBS가 7일 오전 1시에 방송한〈내셔널 지오그래픽-화려한 문어쇼〉란 창(窓)을 통해 들여다보면 훨씬 도드라진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제작진은 문어의 다양한 생태를 아우르기 위해 호주 앞바다와 인도네시아 근해, 그리고 남미 인근 해역까지 누볐다. 세계 굴지의 제작사다운 방대한 스케일이지만 이를 두고 SBS를 탓할 건 못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해저탐사선을 바닷속에 담그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문어를 연구실 특수장치에 집어넣은 뒤 피부 빛깔 변화, 다리 및빨판의 움직임, 먹이를 삼키는 모습 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단순히 시청자에게 볼거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태의 비밀을 밝혀내면서 생생한 학습효과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전문 PD들이 해외 방송제에서 끊이지 않고 수상 소식을 전해올 만큼 우리나라 방송사들의 자연다큐 수준은 이제 유수 방송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했다. 특히 기획력과 끈기만큼은 세계 최고수준이어서 구미의 방송사들도 앞다투어 구입 문의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연구와 병행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밝혀낸다든가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곁들이는 등의 시도가 부족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세계 최고라는 명성은 역시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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