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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43> 국회 의석수 변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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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강인식 기자

4월 11일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우리가 뽑은 국회의원은 비례대표를 포함해 총 300명입니다. 의원 숫자가 300명대에 진입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죠. 국회는 지역구를 늘리기 위해 선거구를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했습니다. 그래서 ‘의석수 변천사’를 탐욕의 역사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그 과정에는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노력도 많이 숨어 있습니다.

남북 통일국회 의석은 300석

대한민국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반목으로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무산됐다. 정부 수립 문제가 표류하자 미국은 1947년 유엔 총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했다. 이에 유엔은 ‘국제연합 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임시위원단은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 입국하지 못했고, 결국 남한 지역에서만 총선을 실시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위원단은 애초 남북한을 인구비례로 나눠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하려고 했으나, 북한지역 선거가 불가능해지면서 남한의 200석에 대한 선거만 추진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헌정회 이철승(90) 원로회의 의장은 “당시 인구비례로 남한의 인구가 3분의 2를 차지했기 때문에 200석은 선거를 하고, 나머지 100석은 북한을 위해 남겨뒀다. 언젠가 북한이 민주선거를 통해 동참하면 통일국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초대 제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3·4·5·8·9·10·12대 국회의원(7선)을 지냈다.

양원제와 유신정우회

1972년 유신헌법을 발효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000여 명을 임명했다. 이들의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이 결정됐다. 사진은 대의원들이 투표하는 모습. [중앙포토]

4대 국회에 233명이었던 정원이 5대에서 291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의원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다. 대통령의 독선에 대한 반성으로 의회 권력의 강화가 큰 이슈로 떠올랐다. 대통령제는 내각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치러진 5대 총선은 사상 처음으로 양원제로 치러졌다. 민의원(하원) 233명, 참의원(상원) 58명이 뽑혔다.

 하지만 내각제를 기초로 한 양원제는 출범 1년도 안 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1년 5월 16일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이끄는 군부세력에 의해 양원제 의회가 강제 해산됐다. 군부세력은 헌법을 고쳐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환원했다. 이렇게 구성된 6대 국회의 정원은 175명. 군사정부는 의원 숫자를 크게 줄였고, 의회의 권한은 크게 축소됐다.

 6대 국회에서는 비례대표제(전국구 의원)가 처음 도입됐다. 이 제도는 다수당에 의원을 몰아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제1당의 득표율이 50%가 넘지 않으면 득표율에 관계없이 전국구 의석의 50%를 무조건 1당에 배정토록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는 72년 10월 유신헌법을 발효했다. 대통령제를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게 됐다.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2000여 명)을 임명했고, 이들의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이 결정된 것이다. 이들이 뽑은 국회의원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으로 불렸다. 비례대표가 사라지고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선출됐는데, 이때 이들이 하나의 체육관에 모여 투표했다고 해서 ‘체육관 투표’란 말이 생겨났다.

1988년 중선거구 → 소선거구로

국회의원들의 본격적인 ‘밥그릇 챙기기’는 민주화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지휘하는 행정부로부터 독립성이 확보됐기 때문에 이들이 만드는 룰(rule)을 누구도 견제할 수 없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국회의 첫 날치기는 선거법이었다. 88년 3월 8일, 13대 총선을 앞둔 국회는 의석수를 276명에서 299명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은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다수당이었던 민정당이 새벽 2시10분 기습 처리한 것이다. 한 선거구에서 득표수 1·2위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1명만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바뀐 것도 이때다. 여야는 선거법의 손익을 따지며 긴 시간을 협상했으나, 합의와 파기를 반복했을 뿐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겉으로는 중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를 놓고 민주주의 제도 발전을 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지역구를 대폭 늘리려는 여야 의원들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그렇게 민주화 이후 첫 날치기는 국회의 밥그릇(의석수)을 23석이나 늘려놨다.

 제1당이 전국구(비례대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한 과거의 유산은 민주화 이후에도 청산되지 못했다.

외환위기와 의석수

노태우-김영삼 정부까지 견고하게 지켜지던 299석을 무너뜨린 건 97년 외환위기였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획정위원회’는 인구 수를 토대로 의석수를 26~31석 줄이는 권고안을 국회의장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자기 지역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의원들이 획정위에 참석했던 동료 의원들을 맹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음은 2000년 2월 2일자 중앙일보 기사의 일부분이다.

 “(획정위의) 민주당 대표로 참여했던 이상수 의원은 동료 김태랑 의원으로부터 주먹질 위협까지 받았고 자민련 김학원, 한나라당 변정일 의원 역시 당내에서 왕따 신세가 됐다. 이들은 특히 지역구가 없어지게 될 위기에 처한 의원들로부터 협박 수준의 비난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국회는 여론의 질타에 못 이겨 밥그릇(의석수) 26석(권고안의 최소 숫자)을 줄이는 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은 국민 보기에 민망했다.

 줄어든 밥그릇은 바로 다음 총선에서 원상 복귀됐다. 2004년 여야는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모두 늘리며 299석을 회복시켰다.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국민과 아픔을 나누겠다”는 국회의 다짐은 단명했다.

2004년엔 여성 전용 선거구 추진했다 좌절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열을 올렸던 2000년(13대)·2004년(14대)에도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은 분명 있었다.

 2000년 국회는 비례대표 후보의 3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토록 한 선거법·정당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이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늘어나게 됐다.

 국회는 2004년엔 ‘여성 전용 선거구’까지 추진했었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여성 후보만 등록할 수 있는 선거구’를 따로 만들자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당시 여야는 이 안을 통과시키기로 잠정 합의했는데, 이 배경에는 ‘여성 유권자의 힘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는 시대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여성 의원을 만들어내자는 이 안은 여론에 밀려 결국 좌절됐다.

 2004년 국회도 큰일을 하나 했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기존의 전국구 제도(1인 1표제)가 국민의 선택권을 무시한 것’이라며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국회는 10여 년 넘게 논의되어온 ‘1인 2표제’를 통과시켰다. 이때부터 유권자는 의원과 정당에 각각 1표씩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화가 거대 정당들의 권력 지형을 크게 바꿔놓진 못했지만, 소수 정당에는 기회가 됐다. 의석수 하나 없던 민주노동당이 단번에 10석을 거머쥔 것이 바로 이때, 2004년 17대 국회였다.

통일 없이 밟은 300석 고지

남북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대한민국 국회는 300석 고지를 밟았다. 2012년 19대 총선부터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회의원의 수는 법률로 정하되, 200인 이상으로 한다’(제41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헌법학자인 서울대 성낙인(법학) 교수는 칼럼에서 “헌법상 200인 이상의 의미는 300명 이상 무한대로 증원할 수 있다는 의미라기보다 200명대를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그 의미를 넘기 어려우니까 최대치인 299명으로 눈속임을 해왔다. 제18대 국회가 의원 숫자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렸다”고 지적했다.

 국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300석을 먼저 권고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관위는 ‘20대 국회에선 299석으로 환원한다는 단서조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게 전제였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여야는 이마저 뺀 채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지역구 1석을 억지로 늘리면서 선거구의 모습도 기형적으로 변했다. ‘지역구 간 인구비는 3대1을 넘어선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맞추면서 현역 의원의 지역구는 유지하려다보니 과거에 없던 이상한 지역구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에 사는 주민은 기흥구에 살면서도 처인구에 출마한 국회의원에게 투표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인구비를 맞추려고 동네 하나를 옆 구에 떼어 붙인 것이다. 사상 최악의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특정 정당이나 후보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자의적으로 나누는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선수가 룰을 만드는 식으로 운영되는 현행 선거구 시스템을 확 뜯어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 국회의장 산하에는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있지만 위원회 결정은 권고안에 불과해 강제력이 없다. 정치학자들은 이 위원회를 독립시켜 별도 기구로 만들고, 결정에 강제력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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