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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원 판결 없인 정신질환 어떤 차별도 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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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24.7%)은 평생 한 번 정신질환에 걸린다. 유럽(25%)과 비슷하고, 미국(46.4%)이나 뉴질랜드(39.5%)보다는 낮다. 그런데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이유가 뭘까.

 정신질환자 중 병원이나 상담소를 찾아 치료를 받는 사람이 적은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는 정신질환으로 실제 상담·치료를 받은 비율이 15.3%에 불과하다. 반면에 미국 39.2%, 뉴질랜드 38.9%, 호주 34.9% 등으로 우리나라의 두 배가 넘는다. 이런 국가에선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듯, 마음에 병이 들면 정신과 병원에 가는 게 당연하다. 우리처럼 정신질환을 ‘숨겨야 할 비밀’ ‘집안의 수치’ 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도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는 정신보건에 쓰는 예산도 우리의 3~10배에 이른다.

 미국 연방정부는 정신질환자의 권리에 관한 조항을 검토하고 개정하는 역할을 하는 정신건강위원회를 두고 있다. 주(州)별로 제정한 정신보건법에서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 매사추세츠주는 정신보건법에 따라 정신질환자가 입원이나 시설에 감금돼 있다는 이유로 그의 권리를 제한할 수 없다. 결혼이나 계약, 직업, 면허, 자산소유에서도 정신질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나라 민법상의 행위무능력자처럼 법원 판결로 후견인이 지정되면 일정 범위 내에서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보험계약 시 정신질환자에게 불리한 대우를 하려면 보험회사가 통계자료 등을 근거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보험 혜택도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호주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정신보건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성명서’를 내고 정신질환자도 다른 시민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주에서는 정신질환을 ‘정신기능에 심각한 장해가 있는 상태’로 한정하고 있다. 중증과 경증의 구분 없이 ‘정신질환’으로 포괄적으로 명시하는 우리와 다른 부분이다.

 영국에서는 2007년부터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반대하기 위해 범국가적 ‘타임 투 체인지(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비듬이 있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은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슬로건이 유명하다. 우리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덜한 선진국들도 꾸준한 인식 개선 운동으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고 있다.

◆F코드=정신질환에 대해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국제질병분류 기호. 우울증·불면증·강박장애·ADHD 같은 가벼운 정신질환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중증 정신질환 모두 F코드로 분류된다. 현재 정신보건법은 F코드로 분류되는 정신질환으로 진료를 받으면 모두 정신질환자로 본다. 법이 개정되면 F코드 질환으로 치료를 받았더라도 환청·망상·비논리적 행동의 반복 등 법에 표기된 증상을 보여야만 법적 권리가 제한되는 정신질환자로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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