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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그리스 긴축안 무효” 38세 전직 토목 기술자…세계 금융시장 흔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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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그리스의 새로운 실력자인 알렉시스 치프라스 좌파연합 대표가 8일(현지시간) 연립정부 구성 협상에 앞서 아테네 광장을 찾았다. 내밀한 곳에서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협상을 앞두고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는 지지자 앞에서 재정긴축 폐기와 은행 국유화를 주장했다. 사실상 불가능한 연립정부 구성보다 다음 달 재선거를 겨냥한 행동으로 풀이됐다. [아테네 신화통신=연합뉴스]

금융전문지 유로머니는 6일 그리스 총선 직후 “정체 모를 혜성이 유로존 하늘에 나타나 금융시장이 긴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체 모를 혜성’은 바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좌파연합(시리자) 대표의 별명이다. 토목건축 기술자 출신으로 올해 38세에 불과한 그가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치프라스는 이번 총선에서 제2당 당수가 됐다. 급기야 8일(현지시간)엔 연립정부 구성 권한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1당인 신민주주의당이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그리스뿐 아니라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을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이 됐다. 이제 금융시장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요동치고 있다.

 그는 이날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에 앞서 아테네 의사당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지자 수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급여와 연금 삭감법(재정긴축)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언급했다. 정계에선 모라토리엄은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어로 통한다. 한마디로 채무를 동결하고 긴축 고삐를 풀자는 얘기다. ‘트로이카’로 불리는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이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대가로 요구한 긴축을 전면 거부한 셈이다.

 로이터 통신 등은 “(이날 연설로) 치프라스의 정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고 분석했다. 너무 선명한 나머지 연립정부 구성 실패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는 다시 한번 선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재선거는 다음 달 17일이다. 정치 부재 상황이 한 달 이상 연장되는 셈이다. 더욱이 치프라스가 이끄는 좌파연합의 의석이 더 늘어날 전망도 나온다.

 파국을 알리는 시계추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도자 없는 그리스 정부는 재선거 전에 채권 이자 2억5000만 달러(약 2800억원)를 지불해야 한다. 국고는 이미 바닥났다. ‘트로이카’는 올 2분기 구제금융 310억 유로(약 46조5000억원) 지급을 미뤘다. “새로 구성될 정부가 긴축 협약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돈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트로이카가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그리스는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 통신은 “그리스 디폴트는 더 이상 충격이 아니라는 게 금융 전문가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이미 그리스는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다. 기존 국채도 ECB와 그리스 시중은행의 금고에 들어 있다.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한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피해볼 해외 민간 은행이나 펀드는 거의 없다.

 남은 그리스 리스크는 바로 ‘그렉시트(Grexit: Greece Exit)’다.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다. 치프라스는 이날 유로존 탈퇴는 입에 담지 않았다. 긴축을 거부하더라도 구제금융은 받아야 하는 속사정이 있어서다. 하지만 그의 긴축협약 폐기 주장이 다음 달 총선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면 상황은 급변한다. 그리스가 트로이카와 정면 충돌하면서 결국 유로존 탈출을 향해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 전문가의 예측이다.

 ‘닥터둠’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는 9일(한국시간) CNBC와의 인터뷰에서 유로존은 “서서히 탈선하는 열차와 같다”고 말했다. 한 술 더 떠 “그리스가 내 년 말까지 유로존을 떠난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그리스 유로존 탈퇴는 확률로도 계산됐다. 최근 씨티그룹은 그리스 이탈 확률이 “기존 50%에서 75%로 높아졌다”고 발표했다. 시한도 명시했다. 12~18개월 사이에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날 수 있다고 했다.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윌럼 뷔터는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떠날 듯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트로이카 구제금융·재정긴축 처방의 역설이다. 채권국이 긴축 고삐를 죄면 죌수록 그리스가 심한 경기침체에 빠져 스스로 유로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가설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이 2010년 이후 그 역설을 줄곧 주장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 “그렉시트는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의 예측”이라고 전했다. 다만 위기가 스페인·이탈리아로 전염되는 것을 트로이카가 잘 막았을 때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스 충격이 다른 나라로 전이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스페인·이탈리아 사수작전’의 성공 여부는 유럽의 동갑내기 두 리더에게 달려 있다. 앙겔라 메르켈(58)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58)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둘을 이렇게 묘사했다. 입장·철학·정책의 간극(Gulf)이 너무나 커서다. 유럽 위기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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