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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익혔다, 김생의 일필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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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대성

이건 붓이 아니라 칼이다. 그렇다. 지금은 컴퓨터 자판으로 글을 ‘치고’ 있지만 선조들은 한때 목판에 칼로 깎았고, 이후 붓으로 썼다.

 전시장 들머리엔 가로 5m, 세로 3m 초대형 수묵화가 걸렸다. 먹물이 흥건한 이 그림은 한국화단의 거목 소산(小山) 박대성(67)의 ‘청량산 묵강(墨江)’. 오로지 흑과 백으로 산세를 일필휘지했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0?)에 대한 일종의 헌사다.

 김생은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고 불렸다. 한국 서예의 전형을 완성한 이로 꼽힌다. 그는 경북 봉화 청량산 굴 안에서 쉼 없이 글쓰기에 정진했는데, 이 때문에 묵강이 흘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박대성 화백의 ‘청량산 묵강’(부분). 전시 개막 며칠 전 한나절 만에 그린 작품이다. 신라 명필 김생의 근거지였던 경북 봉화 청량산에 수시로 드나들며 수묵을 연구한 내공은 그렇게 나왔다. [사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김생 탄신 1300주년 기념 ‘도를 듣다(聞道)-김생과 권창륜·박대성, 1300년의 대화’전이 열리고 있다. 화가 박대성, 서예가 권창륜(69)이 김생을 재해석한 전시다.

 경주에 살며 우리의 근본을 탐구하는 화가 박대성은 그간 청량산을 숱하게 드나들었다.

이 산은 신라 이래 많은 선현들의 수행처였다. 김생의 굴 외에도 원효가 세운 내청량사·외청량사, 고운(孤雲) 최치원이 수도한 고운대와 독서대, 퇴계(退溪) 이황이 공부했던 청량정사 등이 있다.

 박대성은 또 김생의 글씨 2500여 자를 집자(集字)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를 수십 번 옮겨 썼다. 금강역사를 닮았다는 힘있는 필체, “지극한 도는 작위가 없어 대지와 마찬가지”라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그대로 몸 안에 들어왔다.

 서예박물관 이동국 학예사는 “현대 서예가 중 태자사비를 임서(臨書)한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박대성은 “왜 김생이었냐고? 우리 선조니까, 뿌리니까. 김생의 글씨에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의 글씨도 추사의 글씨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대자연의 깊고 오묘함을 글씨에 녹였다. 왕희지의 세련된 맛과는 전혀 다른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 문신 성대중은 김생의 글씨를 두고 “그 획이 마치 삼만 근의 활을 당겨 한발에 가히 수많은 군사를 쓰러뜨릴 것 같다”고 평했다. 혼자 익힌 박대성의 글과 글씨에도 힘, 야성미가 넘친다.

일견 삐뚤빼뚤해 보이는 그의 글씨는 “못 쓰면 어떠냐, 어디 써보기나 해봐라”라고 자신 있게 외치는 듯하다. ‘배운’ 서예가의 단정한 글씨와 한눈에 대조된다.

그는 김생에 이어 성철 스님(1912∼93)을 붓으로 되살리고 있다. 경북 문경 봉암사,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 등을 다니며 그의 자취를 느끼고 그린다. 가을에 열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전을 위해서다.

 이번 전시는 김생의 탁본부터 추사 등 후대의 글씨까지 보여줬던 전반부에 이어 김생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그런데 전시장의 많은 작품들이 표구도 못한 채 색지에 겨우 붙어 걸렸다. 예산이 부족해서다. 29일까지. 02-580-1660.

권근영 기자

◆김생(金生)=통일 신라의 명필. 『삼국사기』에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든이 넘었는데도 글씨쓰기를 쉬지 않아 각체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글씨는 모두 비문과 탁본이다. 대표작으로 통일신라 고승 낭공대사의 행적을 기리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가 있다. 동양의 각종 서체를 통합해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秋史) 김정희는 이 비석과 탁본으로 서체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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