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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회색분자도 사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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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요즘처럼 흑백논리가 판칠 때도 없다. 이번엔 소설가 이문열씨 이야기다. “왜 언론이 안철수를 아바타처럼 키우느냐”는 인터뷰가 진보 쪽 누리꾼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사족처럼 붙인 “깡패인지 모르는 이상한 인물”이란 표현이 좀 나간 느낌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궁금한 대목이다. 안 교수를 향해 “꽃가마 타려 하나” “편지나 들고 와라”는 야권의 이죽거림과 별반 차이가 없다. 똑같은 논리로, 보수 쪽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행보를 모두 삐딱하게 보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인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 온돌방에 가 보면 현실은 다르다. 노숙자들이 무더기로 희생된 예년과 달리, 지난겨울 혹한에 단 한 명도 얼어 죽지 않았다. 최후의 피난처가 만든 기적이다.

 성공회대의 ‘민주자료관’에 가 보면 뜻밖의 장면과 마주친다. 1992년 총선에 이문열이 제일 왼쪽의 민중당을 지지한 사료가 눈에 띈다. 지원연설은 물론 포스터 등장까지 망설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개념 작가’다. 요즘의 이외수·공지영은 저리 가라다. 그는 민주투사였던 민중당 이재오 사무총장(현 새누리당 의원)의 고향 3년 후배다. 같은 재령 이씨(載寧 李氏)로 친척 뻘이다. 이씨는 당시를 “전두환 정권 때 할 말을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라 기억했다. 문단에는 이 의원이 투옥과 수배를 반복하던 시절, 출판사를 찾아가 “문열이가 글을 써줄 것”이라며 외상으로 투쟁자금을 빌렸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뒤늦게 안 이씨는 군말 없이 밤새워 소설을 써주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길에서 시대의 아픔을 공유한 것이다.

 2001년 이씨가 ‘홍위병’ 칼럼으로 분서(焚書)를 당할 때, 딱 3명의 작가만 제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침묵하던 시절이었다. 평소 수줍어하던 박완서씨는 인터뷰를 자청했다. “내가 이문열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이 모욕 당하는데 그냥 넘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이청준씨도 그해 산문집『야윈 젖가슴』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한 작가(이문열)에게 정치권이 확신 어린 매도를 한다면, 과연 문학은 어디에 서야 하나”라며 각을 세웠다. 이 무렵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와 격한 심정을 나눈 사람도 있었다. 바로 소설가 김훈씨다. 이들은 정치성향이 달라도, 오랫동안 그의 문학적 성취와 인생역정을 지켜봐 온 묵직한 작가들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이분법은 무섭다. 제목 하나, 단어 하나로 상대편을 난도질한다. 걸리면 생매장할 기세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정치적 무관심과 부동층(浮動層)을 혼동하고 있다. 중립적이면 ‘어느 쪽에 붙을지 모를’ 박쥐처럼 취급한다. 양쪽에서 모두 ‘회색분자’라 빈정댄다. 흑백 논리가 압도하면 중간지대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양극단의 한쪽에 서야 편하다는 분위기까지 번지고 있다. 하지만 회색분자야말로 다원화 사회의 주역이다. 박 시장의 노숙자 온돌방에 박수를 치고, 이문열의 물음에도 귀를 기울이는 게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86년에도 양극단의 충돌이 극에 달했다. 운동권의 투신자살이 잇따르고, 공권력은 집회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해 5월 21일 서울대 국문학과 박혜정양은 잿빛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26년 만에 이런 비극이 반복될까 겁난다. 우리 역사에서 회색분자는 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두터운 회색지대야말로 성숙한 사회로 가는 균형추다.

 진보 성향의 이외수씨조차 새누리당 후보를 “호탕한 사람”이라 했다가 “배신자”라며 뭇매를 맞았다. 무서운 세상이다. 이런 적색테러나 백색테러를 막는 완충지대가 바로 회색분자들이다. 이제 그들을 부동층 대신 ‘중용(中庸)층’으로 불렀으면 싶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도 양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용(庸)’이란 한자가 비겁하고 쪼잔하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다. 하지만 그 고어는 <342F>이다. 높이 향기가 날 만큼 떳떳하고 용감하다는 의미다. 지금은 회색분자가 되기에도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