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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으로] 프랑스 대선 D-1, 17년 만에 좌파 대통령 나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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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프랑스의 정권 교체를 이룰 인물로 주목받고 있는 사회당 대선후보 프랑수아 올랑드. [AP=뉴시스]

마르크스주의 형성에 영향을 준 3대 원천은 영국 경제학, 독일 철학, 프랑스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라는 말도 1832년 프랑스에서 처음 생겼다. 큰 이변이 없으면 ‘사회주의 원조’인 프랑스의 차기 정부는 사회당에서 맡을 가능성이 크다.

 유구한 사회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지금까지 2~3명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을 배출했을 뿐이다. 알렉상드르 밀르랑(1920~24), 뱅상 오리올(1947~54), 프랑수아 미테랑(1981~95) 대통령이 그들이다. 그중 밀르랑 대통령은 우파로 전향했기에 사회주의자 대통령 목록에서 빼기도 한다.

 17년 만에 엘리제 대통령궁을 차지할 주인공으로 예상되는 후보는 프랑수아 올랑드(57)다. 유력 시사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의 20일자 인터넷판 보도에 따르면 19, 20일에 발표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 22일 1차 투표에서 올랑드가 28~30%를 득표해 25~27%의 대중운동연합(UMP) 후보인 니콜라 사르코지(56) 대통령에게 앞서고, 5월 6일 2차 투표에서는 5~7%포인트 차이로 이길 것으로 예상된다.

사르코지

 사회당은 고무돼 있다. 올랑드 정부의 장관 하마평까지 나오고 있다. 사회당이 이번 대선에 도입한 국민경선은 흥행에 성공했다. 우파도 2017년 대선에 국민경선을 도입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올랑드가 승세를 잡은 것은 사회당이 뭘 잘해서라기보다는 사르코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충동적·공격적 스타일이 문제였다. 올랑드는 대선 기간 내내 자신은 사르코지와 달리 ‘정상적인(normal)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프랑스 헌정사에서 지지율이 가장 낮은(33%) 대통령이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에 대한 유권자들의 향수도 올랑드를 도왔다. 이번 선거는 샤를 드골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이 맞붙은 선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드골파인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11일 올랑드를 찍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았다. 진심이었다. 전 영부인 베르나데트 시라크를 제외한 측근들도 표심을 대거 올랑드에게 몰아주고 있다.

 사르코지는 뭔가 깜짝 놀랄 일을 기대한다. 사르코지 진영은 4500만 유권자 중에는 ‘침묵하는 다수’라는 숨은 표가 있다고 주장한다. 올랑드는 편 가르기로 프랑스를 ‘시끄러운 좌파’와 ‘조용한 우파’로 나누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수도 있다. 10년 전 지지자들의 저조한 투표율로 사회당은 결선투표에 끼지도 못했다. 마침 22일의 1차 투표는 봄방학 기간에 벌어진다. 올란드는 좌파 성향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토론에 능한 사르코지는 1차 투표 후에 치러질 1대1 TV토론에도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일부 미국 언론이 ‘언어장애자’ 취급하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TV토론을 무난히 통과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 또한 쉽지 않다.

 올랑드(Hollande)라는 이름이 알려주듯 올랑드의 조상은 화란(和蘭)에서 왔다. 그는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칼뱅주의 개신교 신자의 후손이다. 세월이 흐르며 그의 집안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올랑드도 자랄 때 가톨릭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아버지는 이비인후과 의사이며, 어머니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했다. 아버지는 우파였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상실한 것에 분노했다. 그러나 사르코지와 마찬가지로 부촌인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자라난 올랑드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파리고등상업학교(HEC)·국립행정학교(ENA)·파리정치대학(IEP)을 거치며 사회주의자가 됐다.

 올랑드의 장점은 소탈한 서민적인 이미지다. 스쿠터로 출퇴근하고 햄버거를 좋아한다. 고급 레스토랑, 롤렉스 시계가 연상되는 사르코지와 대조적이다. 의지력도 꽤 강하다. 이번 선거에 나서면서 와인·치즈·초콜릿 같은 좋아하는 음식을 삼가 몸무게를 15㎏ 뺐다.

 올랑드에게 약점은 행정 경험 부족이다. 당수·국회의원·시장은 해봤으나 장관직을 수행해 본 적은 없다. 미국 대선에서 상·하원의원보다 주지사 경력을 더 쳐주듯 프랑스에서는 파리 시장, 장관, 국무총리 경험에 가산점을 준다. ‘재미없다’ ‘애매하다’는 지적도 있으나 1997~2007년 사회당 제1서기(당수)로서 올랑드는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사회당이 우파에 밀리는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갔다.

 올랑드의 선거 슬로건은 “변화는 지금이다(Le changement, c’est maintenant)”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변화를 지난 미국 대선의 테마로 삼아 집권에 성공했다. 변화는 지금 미국에선 쑥 들어간 이야기다. 변화는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어렵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선거에서는 변화의 손을 들어줬다가도 막상 새 대통령이 변화를 시도하면 ‘극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다른 정파가 집권하면 나라가 망하고, 자신이 집권하면 장밋빛 미래가 열릴 것처럼 주장을 부풀렸다. 사르코지는 이번 선거 결과에 ‘프랑스 문명’의 운명이 걸렸다고 호소했다. 올랑드가 대통령이 되면 프랑스 경제가 스페인이나 그리스의 경우처럼 수모를 당하게 된다는 엄포도 빠뜨리지 않았다.

 올랑드가 당선되면 대통령·장관 연봉의 30%를 깎을 것이다. 정책 결정을 할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은 공정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겠다고 공약했다. 동성 결혼, 일부 안락사 허용도 추진할 예정이다. 문제는 경제 공약이다. 17일 프랑스 경제학자 42명이 올랑드 지지를 선언했다. 후보들의 공약을 경제학의 눈으로 검토해 보니 올랑드가 제일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적자 해소, 부자 과세,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일자리 창출, 교사 6만 명 채용, 주택 50만 호 건설 등 올랑드의 공약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선거기간 내내 올랑드가 사르코지에게 결선투표에서 진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상대는 사르코지가 아니라 올랑드가 ‘진짜 적(敵)’이라고 부른 금융계였다. 그가 프랑스 자본주의의 현 상황을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당 내에서 온건·중도파에 속하는 올랑드가 엘리제궁에 입성한다는 것은 사회당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확고히 하고 오른쪽으로 조금 더 움직인다는 의미다. 미테랑 대통령은 81년 집권 후 일련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아득한 먼 옛날 일이다.

 성장과 복지는 상충 관계가 아니다. 올랑드는 프랑스의 현 복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장 정책을 펼 예정이다. 인접 국가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하다. 올랑드는 25개국이 가입하기로 합의한 신(新)재정협약을 재협상하거나 친(親)성장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공약했다. 신재정협약의 핵심인 긴축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마침 프랑스는 우파가 집권한 나라들로 둘러싸여 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스페인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는 사르코지를 지지하며 선거기간 동안 올랑드를 만나주지 않았다.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경험이 없는 올랑드가 당선 후 국제정치경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주목된다.

 마치 부챗살처럼 극우파·우파·중도우파·중도파·중도좌파·좌파·극좌파가 프랑스 정치를 분점하고 있다. 사회당은 단독으로 집권할 수 없다. 올랑드가 결선투표에 승리하려면 중도파·좌파·극좌파 유권자의 표를 끌어와야 한다. 프랑스 공산당이 포함된 좌파전선의 후보로 ‘시민혁명’을 주장하는 장 뤼크 멜랑숑이 확보할 것으로 보이는 15% 정도의 표는 기본이다. 집권 후 좌파전선 출신의 장관 임명 등 정치적 지분을 떼어주어야 한다. 사회당 내에도 8개 정파가 있다. 올랑드의 자산은 종합(syntheses)의 달인이라는 세간의 평가다. 당내외 정파들의 이익을 조율할 기본 마인드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 올랑드는 중도우파와 우파의 요구도 충족해야 한다. 모든 불법이민자들에게 합법 이민자 자격을 부여하겠다는 좌파전선의 멜앙숑과는 대조적으로 우파는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며 이민자들에게 적대적이다. 반이민 정서를 표로 연결하기 위해 사르코지는 이민자 수를 현재의 18만에서 8만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닌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지방 투표권을 주겠다고 공약한 올랑드지만 프랑스 내에 팽배한 반이민 정서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세계화가 프랑스의 정체성을 흔든다는 의구심을 해소해야 한다. 프랑스 비극작가 피에르 코르네유는 “위난(危難) 없는 승리에는 영광이 없다”고 했다. 비교적 순탄하게 대권에 다가간 올랑드에게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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