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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IMF 3년…갈림길에 선 한국경제

중앙일보

입력

어제 12월 3일은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자금 지원을 받아들인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간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나. 거시경제지표가 반짝하더니 다시 빛을 잃고 있다.

한때 위기극복 자화자찬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정부도 뒤늦게 경제 사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있는 모양이다.

초기에 정부의 위기인식이 그릇됐었다. 단지 가용외화 보유 부족이라고 진단하고 그밖에 금융부실, 기업부실, 경직된 노동시장, 규제만능의 관권, 정치부패 등이 겹겹으로 층을 이루는 위기구조 실체를 외면했다.

그간 미국 등 교역 대상국의 경기호조, 원유 등 원자재의 저가 유지 등 유리한 해외 여건에 힘입어 국내경제가 되살아났고, IMF관리체제의 식이요법 덕분에 경제체질이 어느 정도 단련되고 집단이기의 목소리를 잠시 잠재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부의 경제개혁 우선 순위를 의심할 만한 대목이 없지 않았다.

환란(換亂)으로 인해 집권할 수 있었던 현 정부는 위기극복을 조속히 선언하고 대내적으로는 복지(분배)정책과 대외적으로는 대북정책처럼 생색나는 일에 힘을 쏟아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3년간 돋보이게 개선된 것은 외환사정뿐이다. 외환보유액이 최근 9백30억달러 수준에 이르러 환란 당시의 사정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단기외채 증가, 증시 유입자금의 퇴조 조짐, 여전히 높은 국제 금융시장 가산금리, 불안한 수출입 구조 등으로 미루어 안도할 날은 아직 요원하다.

IMF의 위세가 등등했던 초기에 추진했어야 할 공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미루어왔다. 중장기적 구조조정 작업 추진에 정부의 대중적 인기 영합 성향은 걸림돌이다.

노조 설득 및 불가피한 경우 정면대결을 회피하고서는 국민경제의 장기적 이익을 향해 한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

정부는 그간 기업 두들겨 패기에 상당한 역량을 과시했다. 이제 정부가 강성노조의 힘 빼기에 나서야 한다.

민영화 저지에 나선 한전 노조가 파업을 선언하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총파업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정부는 여기서 밀리면 그간 쌓아온 개혁의 공이 모두 도루묵이 된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경제위기의 밑바닥에는 국민의 먹자판 심리와 이를 조장하는 정치권이 있다. 농가부채탕감 조치의 여야합작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농촌사정은 어떠한가. 어림잡아 인구 10%의 농업인구가 국내총생산(GDP)의 5% 미만을 생산한다.

이 부문에 과거 정부들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및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과 관련해 약 40조원씩 두번 투입했고, 현 정부도 역시 40조원 수준의 자금투입을 실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간 1백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살포된 셈이고, 이것이 바로 농촌부채의 주요 원천이다.

지방 행정관서가 주관한 자금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진정한 영세농은 소외됐을 공산이 크다.

부채탕감 조치를 서두르기 전에 문제의 책임소재를 따지고 빚진 농가의 금융계좌 추적을 통해 상환능력을 판별해야 한다.

대다수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지역에는 빚더미 가계가 더 많다. 기업대출에 혼쭐난 은행들이 가계대출에 주력하고 있어 조만간 가계대출 부실화가 문제시되고, 파산위험에 몰린 도시민들이 탕감조치를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일 것이다.

그밖에도 각계 각층의 욕구불만 분출이 예상된다. 그 때마다 표밭을 의식해 여야는 다시 합작 유혹을 느낄 것이다. 먹자판 나라가 된다.

이것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전철이었다. 몇 년마다 위기증세가 도지는 이들 나라와 합류하는 길은 완만해 보이는 내리막길이다.

반면 모든 경제주체의 절제.근면.성실.창의를 통해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 만들기를 요구하는 험준한 길에 올라야 일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

올해 겨울 노동시장과 정치권에서 한국 경제의 미래가 결판날 것이다. 음산한 계절, 후끈한 열기, 벼랑 위에 선 느낌 더욱 아슬아슬하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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