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92년 패배한 英 노동당서 배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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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호 04면

이번 4·11 총선을 보면서 나는 한국인들이 꼭 알아야 할 이름을 떠올렸다. 닐 키녹(Neil Kinnock), 1992년 영국 총선에서 중도 좌파인 노동당을 지휘한 인물이다. 당시 집권 보수당은 인기가 없었다. 실업률은 높고, 총리는 인기가 없는 데다 장관들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키녹과 노동당은 패배했다. 그래서 키녹과 노동당은 한국의 민주통합당에 훌륭한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 토니 블레어가 지휘한 노동당은 대승을 거뒀다. 블레어는 지금은 미움을 받지만 2002년과 2007년엔 두 번 연속 총선에서 승리해 보수당을 10년 이상 침묵시켰다. 블레어는 적절한 리더십을 행사하면서 중도를 표방하고, 현명한 선거 캠페인을 벌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닐 키녹과 한국의 민주통합당이 하지 못한 것이다.

4·11총선 … 나는 이렇게 본다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 박근혜 전 대표가 중간지대로 이동할 때 같은 중도로 맞서는 대신 더 왼쪽으로 가버렸다. 거기는 중간지대보다 표도 적고 이미 (진보세력에 의해) 채워진 곳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극도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주당이 아니라) 통합진보당에 투표할 것이다. 게다가 한·미 FTA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시작한 게 아니었던가.

통합진보당 얘기를 더 해보자. 민주당이 그들과 동맹을 맺고, 공동 후보를 배치하고, 공동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묘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추악한 전략처럼 여겨진다. 통합진보당은 급조된 동맹이다. 구성원들이 동질적인 것도 아니다. 일부는 심한 강성 좌파인 데다 북한과 지나치게 가깝다. 만약 내가 온건한 민주당 지지자라면 이들에게 표를 주고 싶을까, 아니면 그냥 집에 있고 싶을까? 반대로 내가 60대 이상의 보수라면 그들을 막기 위한 투표를 안 할 이유가 있을까?

90년대 초 영국 노동당은 대안은 별로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보수당의 잘못을 비난하는 걸 선호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 아닌가. 민주당의 이번 선거 캠페인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한다는 게 한명숙 대표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토니 블레어 시절 신(新)노동당처럼 민주당은 우선 비전을 제시한 뒤 비판을 했어야 한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가 솜씨 좋게 이 대통령과 결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면 말이다.

민주당은 젊은 표에 호소했다. 젊은이들의 표를 얻으려면 비판 이상의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국의 20대 중 이대통령을 좋게 말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그럼 민주당을 좋아하나? 전혀 아니다. 4·11 총선 날 투표소 몇 군데를 들러 봤는데 젊은 층이 별로 없었다. 집에 돌아올 때 던킨도너츠 매장에 가봤더니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는 투표권을 위해 거리에서 싸웠다. 하지만 오늘의 20대는 도넛가게에 가는 쪽을 택한다. 비극이다. 하지만 그들을 신나게 할 뭔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

민주당은 리더십에서도 뒤처졌다. 박근혜 전 대표라면 김용민 사태를 처리하면서 시간을 허비했을까. 아마 안 그랬을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제 귀화 한국인을 최초로 국회의원으로 받아들인 당이 됐다. 얼마나 절묘한가. 이건 앞으로 수십만 표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박근혜가 어떻게 반대파를 다루고 새 피를 수혈해 당을 중도로 움직였는지 보라. 새누리당은 이제 의심할 여지 없이 박근혜의 당이다. 90년대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처럼 말이다.

민주당에는 이런 리더십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앞으로 젊은 후보를 더 많이 데려오고 스스로 ‘탈386화’해야 한다. 지금 있는 인물들은 실용적인 행정능력보다는 이념 투쟁과 밀접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진심으로 나이 지긋한 인권 변호사들과 운동권 출신들을 존경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업인 출신이나 기술전문가 등 민주당에는 결여된 행정적 능력을 갖춘 인물들과 교류해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 영감을 주고 재벌의 지배력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제1세대 벤처 기업인을 주시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은 재벌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만 하지 말고 긍정적인 대안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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