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요란한 국제전자도서상(賞)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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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에서 발표된 국제전자도서상만큼 전자도서의 현황을 잘 말해주는 지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수상작은 종이도서들이었다. 물론 대회 성격상 모두 전자도서의 형식을 갖추기는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매러니스의 ‘빈스 롬바르디의 생애’(When Pride Mattered: A Life of Vince Lombardi)나 E.M. 쇼브의 소설 ‘파라다이스 스퀘어’(Paradise Square)에서 전자도서의 특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회 심사위원 스튜어트 브랜드는 시상식 전체가 “코미디와 대실패의 중간”이라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딕 브래스는 시상식의 목적이 전자도서의 홍보에 있었다며 행사의 체면을 살리려 애썼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성공이었다. 브래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전자출판 책임자로 국제전자도서상 재단을 구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1년 전 그 상을 발표할 당시 전자도서가 태동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홍보기회라도 활용해야 했다.

그러던 중 지난 3월에는 스티븐 킹이 ‘라이딩 더 불릿’(Riding the Bullet)이라는 단편소설을 전자도서 형식으로만 출간했고 2일간 40만 명이 주문했다. 그 소식에 자극받은 기존 출판업자들은 앞다퉈 책의 디지털화에 나섰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킹의 시도에 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간과됐다. 킹이 출판한 책은 65쪽으로 기존 출판시장에서는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분량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바로 전자출판의 장점이 있다. 전자책은 길든 짧든 관계없이 다양한 형식으로 분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전자도서상은 출품자격을 중장편으로만 제한했기 때문에 킹의 단편소설은 심사대상에 오르지도 못한 것이다.

그 시상식과 때를 같이해 제정된 독립전자도서상은 세계 전자출판계의 현황을 더 정확하게 반영할 것 같다. 기존 중장편 전자출판 소설, 2천 단어 길이의 작품, 링크로 연결된 하이퍼텍스트, 디지털 형식의 멀티미디어 소설까지 대상으로 한다. 대회 조직위원 M.J. 로즈는 전자출판이 낳은 최초의 스타로 그녀가 인터넷에서 자가출판한 소설 ‘립 서비스’(Lip Service)는 포켓 북스에서 책으로 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독립전자도서상 운영자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전자출판 업계의 판도를 더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나날이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심사위원 중 한명인 제이슨 엡스타인은 권위있는 랜덤 하우스 편집국장 출신이다.

전자 또는 출판업계 관계자라면 전자출판이 이미 도서공급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자도서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독자들이 왜 인쇄도서와 같은 가격으로 전자도서를 사야 하는지, 게다가 보통 책처럼 감촉이 좋거나 취급이 용이하지 않은 비싼 휴대형 단말기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딕 브래스는 “전자도서가 인쇄본을 대체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의 도서 박람회 이후 확실해진 사실 한 가지는 그 날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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