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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광장에 들어선 당신도 내 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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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홍승혜씨는 “예술의 본령은 일상으로부터의 탈피일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엔 일상으로 환원됐다. 그림이 현실이 돼 그림 속을 들락날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간 추구했던 ‘유기적 기하학’ 시리즈를 사각의 공간으로 확장했다. 일종의 ‘좌대(座臺) 없는 조각’ ‘액자 없는 그림’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시장에 들어온 관객은 “이게 다에요? 대체 작품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홍승혜(53)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의 개인전 ‘광장사각(廣場四角)’이 그렇다. 전시장 바닥의 격자무늬(grid), 네 방위를 나타내는 알파벳이 열매처럼 매달린 ‘말나무_나침반’, 격자를 변용해 만든 벤치와 책꽂이, 화분 수십 개를 세워 놓은 녹색지대 등으로 구성됐다. 야외 마당은 흡연 표지판을 단 공간으로, 프로젝트룸은 미디어 아트가 상영되는 와인바로 변모했다.

 전시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다. 에르메스 매장 건물 3층이다. 홍 교수는 “이 건물 뿐 아니라 도시에서 반복되는 요소가 사각이다. 이 사각을 하나의 광장으로 설정했다. 난 프레임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여기 오가며 완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전시장에서 아연해 하는 당신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홍 교수의 장기는 지우고 뺀 듯한 깔끔한 화면·공간 구성. 화가가 된 이유도 그랬다. “할 수 없는 걸 다 지우다 보니 화가가 남더라. 그렇게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내 작업도 그렇다. 안 되는 걸 지우고 되는 것만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대표작은 ‘유기적 기하학(Organic Geometry)’ 시리즈. 컴퓨터로 격자를 만든 추상화다. 1997년 포토샵 프로그램을 다루다가 해상도를 한 자릿수로 낮췄을 때 나오는 픽셀에 주목했다. 이 픽셀을 벽돌 쌓듯 증식하고, 붙이고, 잘라서 이미지를 만들었다. “백지 위를 헤매다가 길잡이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난 그리고 싶은 대상이 한 번도 없었다. 뭘 그리냐보다 화면의 점유·분할 방식, 구도 등에 더 관심 있었다”고 설명했다. 제목엔 자연(유기적)과 기계(기하학), 따뜻함과 차가움 등 상반된 두 개념을 섞었다. 회화로, 판화로, 미디어 아트로, 입체 조형 등으로 선보인 이 ‘유기적 기하학’이 이번엔 가구로, 건물로, 광장으로, 공간으로 확장된 셈이다.

 에르메스 재단은 12년째 국내 젊은 미술가를 선정해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하고 있다. 2003년부터 후보작가 3명을 선정하고 전시를 연 뒤, 최종 수상자를 선정했는데 당시 첫 후보작가가 서도호(50)·양혜규(41)·홍승혜였다. 수상자는 서도호. 서씨와 양씨는 해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로 성장했다.

 그간 홍씨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길렀다. “난 그저 ‘근접이웃(nearest neighbor)’. 내가 손 닿을 수 있는 대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니어리스트 네이버’는 포토샵 프로그램의 툴로, 해상도가 바뀔 때마다 상이 깨지지 않도록 유지해 주는 기능을 한다. 10년 만에 다시 아뜰리에 에르메스로 돌아온 홍씨는 이번에 심래정·박광수 등 제자들과의 협업도 선보인다. 6월 12일까지. 무료. 02-544-7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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