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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아태 지역 복귀 본격화… 중국과 대결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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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 도착해 현지 관계자들과 함께 의장대 앞을 걸어가고 있다. 필리핀과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은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두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프놈펜 AP=연합]

서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발걸음이 급해 보였다. 인도를 거쳐 지난달 30일 밤에는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 나타났다. 이어 이튿날 캄보디아 훈센 총리와 회담했다. 무엇인가 서두르는 듯한 행보였다. 캄보디아를 방문한 후 주석의 관심사는 곧 프놈펜에서 열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정상회담이었다.

중국 신화(新華)통신은 “양국 정상이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인 우호와 협력관계 발전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로이터 통신의 보도는 뉘앙스가 아주 달랐다. 로이터는 “중국이 올해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국인 캄보디아에 회의 석상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의제로 꺼내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보도했다.

3일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서는 중국이 원하지 않던 장면이 벌어졌다. 필리핀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의 주도로 남중국해 문제는 회의 석상의 주요 의제가 되고 말았다. 캄보디아를 통해 ‘남중국해 문제의 국제화’를 막으려고 했던 중국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동남아에서의 중국 고립 추세 뚜렷
‘남중국해’라고 불리는 지역은 중국에 맞서 필리핀과 베트남·브루나이·말레이시아 등이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묻힌 스프래틀리(중국명 난사)·파르셀(중국명 시사)군도 등의 영유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2002년 중국과 아세안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각국 행동 선언’을 발표했다. 중국은 이를 통해 ‘관련 당사국+중국’이라는 일대일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자는 틀을 세웠다. 그러나 이 틀은 지금 무너지고 있다.

필리핀 알베르트 델 로사리오 외무장관은 아세안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2일 “아세안 국가끼리 먼저 합의를 한 뒤 중국과 다시 논의하자”는 입장을 천명했다. 중국에 정면으로 던진 ‘도전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또 다른 대국 인도의 S M 크리슈나 외무장관은 7일 “남중국해는 전 세계 국가의 공동 재산”이라고 호응했다.

필리핀의 주장에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나머지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다른 아세안 국가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이긴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 쉽게 찬동하지 않는 분위기임에는 분명하다.

문제는 ‘왕의 귀환’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2001~2009년) 때 미국은 동남아에 대한 관심을 줄였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국제적 역량을 모두 집중하면서 동남아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사안을 소홀히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9년 집권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들어 동남아는 다시 미국의 전략적 시야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변했다. 최근 들어 동남아에 대한 미국의 입김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유력한 동남아통으로 꼽히는 이선진 전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는 “동남아에서 현재 미국과 중국이라는 틀이 강력하게 부딪히고 있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남중국해를 둘러싼 최근의 움직임은 이를 예민하게 보여주는 현상 중의 하나”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역사적인 미얀마 방문을 통해 동남아에 관한 개입 정책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올해 1월 25일 국정 연설을 통해 “미국은 태평양 국가”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미국의 최우선 전략 대상임을 천명했다. 미 국방부 또한 1월 초 아시아·태평양 주둔군 강화 방침을 밝혔다.

동남아 국가와 중국이 남중국해를 두고 신경전이 부쩍 잦아지기 시작한 시점도 지난해다. 베트남은 중국에 앞서 국제적인 유전 개발업체들과 합작으로 이 지역 개발을 시도했고, 필리핀 또한 스프래틀리군도를 비롯한 남중국해 일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나섰다.

필리핀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과 정면으로 맞설 추세다. 그런 필리핀에 대해 중국과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이 있는 일본이 지원에 나섰다. 필리핀에 해양순시선과 선박 통신시스템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베트남 또한 연간 120억 달러를 넘어선 중국과의 교역 수지 적자, 대국 중국의 굴기에 대한 우려 등에 따라 미국과의 교류 협력 강화에 나서면서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다툼에 관한 국가 안보의 축을 미국으로부터 찾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에 최신 전함을 배치하는 한편 앞으로 필리핀과 태국 해역에서 전투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이달 3일에는 호주 북부 다윈 지역에 처음으로 미 해병대 병력 200명이 도착했다. 지난해 11월 미국과 호주가 다윈 지역에 미 해병대 2500명을 순환 근무케 하고 전투기를 증강 배치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조치였다.

중국의 전통 우호국 미얀마도 흔들
미국은 미얀마와 22년 동안 단절됐던 외교관계를 곧 복원할 예정이다. 7일에는 새 미얀마 주재 대사를 지명했고, 바로 의회 인준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최근 미얀마가 보인 변화에서 충분히 예견했던 일들이다. 우선 미얀마 민주화의 아이콘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해금과 국회 진입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얀마 테인 세인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연합(EU), 아세안의 선거 감시단 입국을 허용한 뒤 4월 1일 보궐선거를 실시했다. 수치 여사와 그가 이끄는 국민민주주의연맹(NLD)은 후보를 낸 45곳 중에서 43곳을 차지해 전체 644석인 미얀마 의회의 7% 의석을 차지했다.

미국과 EU 등은 이에 맞춰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했으며, 미얀마는 정치범 석방과 반체제 인사의 귀국 보장에 이어 각종 경제개혁 조치로 이에 부응해 왔다. 지난해 9월에는 환경 파괴 논란을 빚고 있는 중국 국영기업의 미얀마 내 대규모 수력발전댐 건설 사업을 취소했다. 미얀마 북부지역 7곳에 중국이 36억 달러를 투입해 생산 전력의 90%를 가져가겠다고 했던 계획이다.

인도양 진출 노린 中 ‘미얀마 통로’ 막힐 판
인도양으로의 진출은 중국의 사활이 걸려 있는 국가적 차원의 전략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자국의 서남부 윈난(雲南)~미얀마 내륙~인도양을 잇는 이른바 ‘미얀마 통로(corridor)’ 계획을 추진했으나, 미얀마는 테인 세인 대통령 정부가 들어선 뒤 추가적인 철도 건설과 도로 확충공사의 착공을 허가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선진 전 주 인도네시아 대사는 “인도양 진출이라는 전략적 이해에 따라 대규모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이 미얀마에서 일시에 사라지기는 힘들다”며 “그러나 미국의 본격적인 동남아 진출에 따라 미얀마 또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정융녠(鄭永年)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연구소 소장은 “중국이 국제적인 룰에 따라 펼치는 다자 협의의 틀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양자 협의의 틀을 고집하다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한 타이밍을 놓쳤다”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이웃의 대국인) 중국이 스스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맞닥뜨린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다수 동남아 국가가 중국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메콩강 유역 개발(GMS)에 대해서도 미국이 환경문제를 거론하며 제동을 걸 태세다. 중국 윈난에서 싱가포르까지 연결하려던 철도 건설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될지 미지수다.

게다가 한국과는 마라도 남쪽 이어도에 대해 감시선을 정기적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밝힌 뒤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상태다. 일본과는 전통적인 영유권 분쟁 지역인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와 동중국해 유전 개발 지역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교류 협력 강화로 관계가 다소 좋아진 대만을 제외한다면, 중국 외교는 동남아와 동북아 해역에서 대부분의 이웃 국가들과 마찰을 벌이고 있는 추세다.

중국의 외교가 보이는 특징은 ‘강력한 실리 추구’다. 자원 확보를 위해 2008년께 유혈참극을 주도한 아프리카 수단의 정부군을 지원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급증하는 경제실력에 따라 역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의 국방력 등도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대국’이라는 인상과 우려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지나칠 정도로 실리만을 추구하면서 국제적인 룰이나 가치에 따른 현안 해결을 회피하려는 중국의 외교적 지향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가속화하면서 동남아와 동북아 국가는 안보의 축을 미국에서 찾거나 그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중국의 외교가 새로운 시련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관측이 그래서 나오고 있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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