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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여론조사 경선을 불허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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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허병기 전 한국폴리텍대 이사장은 정당 여론조사의 산증인이다. 30년 전부터 조사했다. 여론조사로 이름난 1990년대 민자당의 사회개발연구소, 2000년대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에서도 숫자를 봤다. 대선이 있던 2002년엔 1000번 조사했다고 한다. 2007년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여론조사 룰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이토록 장황하게 소개한 건 여론조사로 먹고 산 그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국회의원을 포함해 공직후보를 여론조사로 정하는 거다.

 그러나 현실의 여론조사는 도전을 불허하는 무소불위다. 확장 진화 중이기도 하다. 현역의원 컷오프 기준으로, 국민참여경선 모집인단 조사로, 또 경선 또는 공천을 위한 예비후보자 지지율 조사로도 쓰인다.

 여론조사가 그만큼 엄밀한 도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전화가 오면 20~49세 연령대로 체크해 달라”고 했다는 건 그나마 애교 수준이다. 경쟁 후보를 지지하는 이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통화 중이 되도록 해 조사 전화를 못 받게 하거나 휴면 일반전화 회선을 싹쓸이해 응답 확률을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정상적으로 해도 틀리기 일쑤였다. 불과 이태 전 지방선거 개표일에 한 여론조사 기관이 안상수 인천시장, 이계진 강원지사와 정우택 충북지사의 탄생을 예측했다. 사운(社運)을 걸고 한 조사인데도 그랬다.

 사실 선거에 임박해서 하는 여론조사는 여론조사가 아니다. 여론조사의 전제는 무작위로 표본을 추출한다는 것이다. 5만 명 중 3000명에게 전화해 1000명으로부터 답을 들어야 정상이다(33%). 서구에선 그렇다. 우린 응답률이 10% 중반대다. 이마저도 근래엔 2%대인 게 많단다. 5만 명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야 응답자 1000명을 채울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여론조사라면 신물이 날 상황인데도 응했다면 누군가의 지지자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조직선거인 것이다.

 “누가 후보가 되는 게 좋으냐” “내일 투표하면 누구를 찍겠느냐”란 질문에 따라 순위가 바뀌기도 한다. 근본적으론 “여론조사는 투표할 사람과 선거일에 상습적으로 집에 머물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딕 모리스)는 문제도 있다.

 여론조사는 이렇듯 잣대나 체로 쓸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당의 편애는 계속되고 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때 이후 현상이다. 당시 두 후보의 지지율이 오차 범위(4.6%포인트) 내였으니 비긴 것이다. 통계학적으론 가위바위보나 동전 던지기라도 더 했어야 맞다. 2004년엔 한나라당이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좁힌다는 이유를 들어 여론조사를 표로 환산하는,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방안을 생각해 냈다. 민심 수렴이란 정당의 기본 기능이 망가졌는데 수리할 생각은 안 하고 미봉책만 도입한 것이다.

 정당의 역할 중 그나마 작동하는 게 선거고, 후보를 추천하는 것이다. 정당은 제대로 된 후보를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선출해 유권자에게 제시하고 유권자들이 사려 깊게 후보의 자질과 능력, 정책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게 정당의 권리이자 의무다. 정당이 강해지는 길이고 대의제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여론조사는 그 과정에서 ‘소극적 지식’(벤저민 긴스버그)에 머물러야 한다.

 새누리당 개혁 논의 과정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당에도 여론조사 경선은 안 된다는 연구결과가 쌓여 있었다. 당은 그러나 막판에 가선 결국 간편함, 효율성을 들어 여론조사 경선을 택했다”고 토로했다. 정당이 게으른 건가, 몰라서 용감한 건가. 아니면 ‘꿍꿍이’가 있는 건가. 사천(私薦)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도구로 쓴 게 아니냐는 의심 말이다. 제 일인 공천제도 하나 제대로 못 만들면서 행정부를 향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다시 허 전 이사장의 얘기다. 그는 “정치문화가 여론조사로 가버려서 이제 시비를 가리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고 걱정했다. 그래도 대나무 숲에서 외친 두건장이가 있었기에 1000년 뒤 후손도 경문왕의 귀 생김새는 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여론조사 경선은 민주선거 원칙과는 거리가 먼 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