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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떠나 아이들 마음 치료나선 고현주 사진작가, 문경보 심리상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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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정심여자산업학교(안양소년원) 수감생 10명이 카메라를 손에 들고 소년원 마당에 섰다. ‘용서’를 주제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촬영에 앞서 수업을 담당한 고현주 사진작가는 학생들과 용서의 의미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눴다. 난상토론 끝에 아이들은 “용서는 내 마음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들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마음이 시원해졌다”고 말했다.

#문경보 소장의 문청소년교육상담연구소(서울 동대문구)에는 매일 학생들로 북적인다. 상담을 받다 눈물을 쏟는 학생들 때문에 화장지 한 곽이 한나절이면 동난다. 아이들이 털어놓는 고민은 거의 부모와의 관계로 비롯된 문제다. 하지만 문 소장은 “문제 학생은 없다”고 말한다. “아이마다 견디는 힘이나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엄마와 같이 있고 싶고, 아빠를 그리워하다 마음에 생긴 병이 ‘이유 없는 반항’의 진짜 이유죠.”

 성적과 입시에만 관심이 쏠려 있을 때 사각지대에 몰린 아이들이 있다. 사고만 치는 문제아들은 물론 성적이나 특기가 평범한 아이들도 부모와 교사의 관심 밖이다. 교직에서 떠났지만 이들을 여전히 품고 위로하는 교육자들이 있다. 교사 출신으로 청소년 돕기에 나선 고현주 사진작가와 문경보 심리상담가다. 교단을 떠났어도 상처받은 아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마음을 보듬고 있다.

고현주 사진 매개로 소년원 아이들과 소통

고 작가가 끌어안은 아이들은 소년원에 수감된 학생들이다. 2008년 안양소년원을 찾아 ‘사진 인성’이라는 수업을 개설했다. 지난해 9월엔 소년원의 특별 허락을 받아 제주도로 체험학습도 다녀왔다.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 촬영한 작품들을 모아 지금껏 네 번의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국회에서 열린 전시회를 찾은 한 학생의 어머니는 “내 딸이 국회의원들 앞에서 전시회를 열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문제아’ ‘범죄자’ ‘수감자’라는 주홍글씨 대신 ‘사진작가’라고 불린 그 순간을 지금도 가슴 벅차한다.

 고 작가가 소년원을 찾은 건 사진작가로 명성을 얻던 시기였다. 자신의 사진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뜨거워지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사진 작업과 전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싶어 찾은 곳이 소년원이었다. “제주도에서 6년간 중학교 음악 교사를 했었어요. 아이들과 만나면서 나를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그의 수업에는 사진 기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등에 대한 질의·응답만 오간다. 아이들은 각자가 찾은 답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진을 이어 붙이고 일기나 에세이를 쓰면서 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노출·셔터·스피드 같은 기술은 전혀 다루지 않아요. 사진을 매개로 삼아 아이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끄집어낼 뿐이죠.”

 처음에 학생들이 사진에 담은 이미지는 하나같이 외롭고 거칠다. 버려진 화분에 담겨 바싹 말라가는 화초, 화창한 날 길거리에 세워진 장우산, 머리가 깨진 꼬마 조각상 등 버려지고 상처받은 사물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아이들의 사진은 ‘상처’라는 주제로 모여들었다. 서로의 사진을 보다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가슴 속에 묻어놨던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수업을 통해 사진작가의 꿈을 갖게 된 학생도 적지 않다. 출소 후 진로에 대해 고 작가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도 상당수다. 이들을 돕기 위해 그는 올 초 ‘꿈꾸는 카메라’라는 법인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어요. 법인은 소년원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다시 좌절감을 겪지 않게 도와주는 보금자리인 셈이죠.”

 그는 “아이들을 만나기 전엔 ‘얼마나 나쁜 아이들이기에 폭행·절도 같은 범죄로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만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결과만 보고 평가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공감해줘야 해요. 편견을 버리고 이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면 어떤 아이라도 잃어버렸던 길을 다시 찾을 겁니다.”

문경보 상담심리 배워 매일 6~7명 치료

문 소장의 심리상담에는 특징이 있다. 아이뿐 아니라 부모까지 상담을 받게 하는 것이다. “아이가 반항을 하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일 때 아이만 치료해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요. 환경, 특히 부모님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죠.”

 문 소장의 공감 치료는 실어증에 걸린 학생들이 상담소를 찾아온 첫날 입을 떼게 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아이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준 게 전부다. 소파에 앉아 TV 보고 과자도 맘껏 가져다 먹게 놔뒀다가 어둑어둑해져 집에 갈 때가 되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래도 이렇게 편하잖아’라고 얘기를 건네는 식이다. “실어증을 앓는 아이들은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말 좀 하라’는 압박을 하기 때문에 말을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죠.”

 그를 찾아오는 학생들은 매일 6~7명이 넘는다. 아이들이 털어놓는 문제는 하나같이 ‘부모와의 갈등’이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도 부모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원인인 경우가 많아요.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부모에게 아이의 진심과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상담의 목적이에요.”

 그는 서울 대광고에서 22년간 교편을 잡았던 전직 교사다. 가출한 학생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신문 배달을 하느라 지각이 잦은 제자를 위해 아침마다 집까지 찾아가 함께 등교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상담심리학을 배운 것도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진로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대광고 재직 시절 그가 직접 만든 ‘진로상담프로그램’으로 올 2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자들의 아픔을 끌어안느라 건강에 문제가 생겨 퇴직한 뒤에도 학생들이 눈에 밟혀 상담소를 차렸다. “아이들에게 나란 존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게 바람이에요. 힘든 아이들을 이해해주는 사람, 지친 마음을 기댈 수 있게 곁에 있어 주는 어른들이 많아진다면 그땐 저도 아이들 곁을 떠날 수 있겠죠.”

  글=김소엽·박형수 기자 사진=황정옥·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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