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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 추상화, 가난하고 자유없던 70년대를 읽는 거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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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병소의 ‘무제’. 신문지에 볼펜과 연필을 빼곡히 덧칠해 나무껍질처럼 거칠거칠한 느낌을 준다. 350×76×8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70년대 최병소(69)는 신문지 위에 연필을 싹싹 덧칠했다. 그리는 게 곧 지우는 것이었다. 의미 없는 반복을 통한 자기부정, 종이와 흑연이 일체화되고 흡수되고 침투하며 지우고 칠하고 부딪치고 찢어지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 어떤 이들은 그의 새까만 신문지 작업에서 당시 혹독했던 언론 검열을 떠올리기도 했다.

 “쳐부수는 일과 해체하는 일을 같이 해야 하는 모순된 시대, 그게 1970년대였다. 리얼리티를 상실한 추상적인 시대였으니, 당시의 표현양식이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우환(76)은 지난달 17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대중 강연에서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가난하고 얼어붙고 자유도 없고 물감이나 모든 재료가 많이 부족했던 시대. 그래도 사회는 힘이 있었던 시대. 그가 회고하는 40여 년 전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단색화를 “저항의 한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왜 무채색으로 반복하나. 반복은 의미가 없고, 의미에 대한 부정이고, 저항이다. 색채, 즉 현실에 대한 부정이다.”

 단색화(單色畵), 모노크롬(monochrome), 한국적 미니멀리즘-. 1970년대 우리 화단을 휩쓸었던 백색조의 추상화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재료의 물성, 그리고 지우고 그리는 반복은 추상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당시의 엄혹한 정치·사회적 현실과 유리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우환 자신도 “70년대 후반 단색화파가 생기면서 권력화하고, 이후 자기반복이 심해졌다”고 비판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은 70년대를 휩쓸었던 이 추상화풍에 이름을 붙여주는 전시다. 여러 이름들을 ‘단색화’로 정리,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한국 미술의 브랜드를 갖자는 취지로 기획됐다. 단색화만 모은 것으론 국내 최대 규모로 김환기·곽인식·박서보·이우환 등 17명의 전기 단색화가와 이강소·문범·이인현·김춘수 등 14명의 후기 단색화가의 150여 점을 전시한다.

 초빙 큐레이터로 윤진섭 호남대 교수가 전시를 기획했다. 그는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 단색화 특별전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으로 ‘월간미술대상’ 전시기획부문 대상을 받은 바 있다.

 단색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다. 이우환의 강연에 이어 오는 14일엔 당대 단색화 운동의 주역 박서보(81)가 나선다. 5월 11일 단색화에 대한 국제학술심포지엄도 준비됐다. 전시는 5월 13일까지 열리며, 6월부터 전북도립미술관으로 이어진다.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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