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2010년 10월 22일 멕시코 아카풀코 페어몬트 호텔 로비.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ANOC) 총회에서 2018년 겨울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놓고 경쟁지인 평창(한국)·뮌헨(독일)·안시(프랑스)가 첫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결과는 뮌헨의 깔끔한 승리. 뮌헨팀은 위풍당당하게 로비를 누볐다. 하지만 평창·안시팀은 행사 후 대부분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 외신기자는 “개선장군(뮌헨) 대 패잔병(평창·안시) 같다”고 평했다. 그러나 평창 유치위 대변인 나승연은 달랐다. 각국 기자들 앞에서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뮌헨은 프레젠테이션의 기준을 높여줬습니다. 우리도 분발할 수 있게 해줘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더 나아질 일만 남았습니다”고 말했다. 결코 주눅이 들지 않은 태도였다.
약 8개월 후인 지난해 7월 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마지막에 웃은 쪽은 평창이었다. 유치위원단의 노력에다 나 대변인의 세련되고 침착한 영어·불어 프레젠테이션은 IOC 위원들의 마음을 녹였다. 나 대변인은 ‘더반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정치권의 영입 경쟁도 뜨거웠다. 하지만 그는 스타덤에 오른 뒤의 만족감을 즐기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침잠했다. 이름이 잊혀질 무렵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왔다.
-정치권의 러브콜을 마다하며 실용서로 컴백한 이유는.
“이 책은 평창 유치 활동을 하기 이전부터 기획했다.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유난히 큰 한국에서 영어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노하우를 알리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영어를 잘하는 것과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것은 별개다. 평창의 성공 스토리를 통해 한국인 독자들이 프레젠테이션의 실전 팁을 쌓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였다.”
-한국인의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구체적 팁을 준다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때는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요’라는 말은 금물이다. 청중은 당신이 잘하기를 바라지, 사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승리를 원한다면 승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실전 연습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한 열쇠다. 프레젠테이션에선 패션으로, 눈으로 또 손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연설 요지를 다이어그램 등으로 이미지화하여 연설에 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림은 글보다 힘이 세다. 목소리의 톤과 강도를 잘 조절해 감정을 풍부히 섞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 뛰어난 웅변가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 총리는 ‘1분을 연설하기 위해 1시간을 연습
한다’고 했다.”
-당신은 영어권에서 자란 배경이 있으니 잘하는 거 아닌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할 땐 무조건 발음을 굴리려고 하는데, 잘못이다. 영어 원어민들이 우리 발음을 잘 못 알아듣는 이유는 많이 굴리지 않아서가 아니다. 부정확한 발음 때문이다. ‘R’ 발음은 혀를 깊이 꼬부려 발음하는 게 아니라 입 안쪽으로 혀를 약간 더 집어넣어 발음하는 것이며, ‘L’ 발음은 혀가 윗니에 닿게 발음하는 것이다.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말이 잘 통하는 국제 영어를 구사하면 된다. 모국어의 억양을 쓰더라도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살아 있는’ 영어를 쓰는 게 열쇠다.”
-처음부터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잘했나.
“아니다.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연설 관련 과목에서 C학점을 맞아 충격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 그때의 문제는 내가 연설문 작성법을 몰랐다는 점이다. 어떤 청중에게 어떤 내용을 말할 줄 몰랐고, 무작정
-갑자기 영어 연설을 잘하게 된 배경은 뭔가.
“말을 잘하기 위해선 잘 들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연설을 하면서도 청중의 느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연설에 들어가기 전엔 청중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것이 최고 프레젠터들의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또, 자신이 말하는 내용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 청중은 귀신처럼 알아챈다. 저 사람이 진심인지 아닌지. 훌륭한 연설가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평창의 세 번째 도전의 꽃은 프레젠테이션이었고, 감동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유머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도 있다.
“프레젠테이션은 쇼다. 청중의 관심을 끌려면 그들을 웃겨야 한다. 코미디언이 되란 얘기가 아니다. 청중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일종의 예능감을 갖춰야 한다. 영어권 청중을 대상으로 유머를 구사할 경우엔 자신이 사용하는 영어 단어를 청중이 잘 이해하는지, 연설 전에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에게 확인하라. 그리고 각 문화권에서 잘 통하는 유머 코드를 학습해야 한다. 자기 유머를 듣고 청중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신경 쓰지 말라. 몇 사람이 가볍게 입꼬리만 올려도 성공이다.”
-책에 ‘청킹(chunking)’이나 ‘see-stop-say’ 기법과 같은 용어들이 나오는데.
“유려한 연설로 이름 높았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도 한때 말을 너무 못해 라디오 DJ자리에서 해고됐다고 한다. 그가 명연설가가 될 수 있었던 건 ‘see-stop-say’ 기법이다. ‘(원고를) 보고, (잠깐 말을) 멈춘 후, (청중을 바라보며) 말을 하라’는 얘기다. 청중에겐 안정감을 주고 연사에겐 자신감을 주는 방법이다. 게다가 연설의 속도도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영어 문장의 경우 절·구별로 문장을 끊어서 읽는 것이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의미 전달에도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Koreans will never agree to that’이란 문장은 ‘Koreans’라는 부분을 끊어서(chunking) 강조할 경우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반대할 거다’라는 뜻이 되고 ‘that’을 강조하면 ‘한국인들은 (다른 아이디어는 몰라도 그 아이디어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런 기법을 체화해서 자유자재로 소화해야 한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