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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팍 도사’와 청춘 콘서트만으론 안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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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30면

하겠다는 건지, 하지 않겠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주변에 그걸 아는 사람도 딱히 없는 것 같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정치 얘기다. 밖으로 돌며 장외정치를 이어가던 그가 한 발짝 더 정치 속으로 들어오긴 했다. 지난주 서울대 강연을 통해서다. 빙빙 돌린 말이 분명하진 않지만 ‘정치를 할 수도 있다’는 게 강연 요지다. 여야가 잘하면 굳이 안 나서겠다고 했는데, 그런 그가 정치권을 칭찬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날 강연에선 “그냥 싸우기만 한다”고 여야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쯤 되면 정치를 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봐야 한다. 적어도 정치판에선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끝까지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전형적인 연막(煙幕) 행보다.

최상연 칼럼

정치 행보만이 아니다. 안 원장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좀처럼 알려주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통일·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언급을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드문 신비주의다. 통상적이라면 정치 경력과 이념 방향, 정책으로 정치인을 판단한다. 하지만 안 원장의 정치 경력은 전무하다. 정치인이 아니었으니 무슨 정책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방법도 없다. 이념적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는 언급도 없다. 기껏해야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게 전부다.

안 원장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도 잘 모르겠다. 우후죽순의 안철수 팬클럽엔 보수·진보가 극단으로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안철수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선거판의 자생적 매니어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서울 동대문갑의 무소속 조광한 후보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일했다. “안철수 대통령을 만들고 싶습니다”란 게 선거 구호다. ‘시민 후보’를 자처하며 부산진을 지역에서 무소속 후보로 뛰는 차재원 후보는 새누리당의 정의화 국회부의장과 일했다. 그는 “철수야 나와라, 새 정치 나와라”로 지역구를 누빈다. 그런 부류의 총선 후보가 전국에 20여 명인데 그들의 노선은 제각각이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한국은 출산율 최저에 자살률이 최고인 나라다. 사교육 광풍 속에 직장을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속출하는 사회다. 수치로도 나타난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입소스(Ipsos)가 지난달 24개국 국민에게 설문을 돌렸더니, 한국 국민 10명 중 8명이 ‘현재 생활에 불만’이라고 털어놨다. 그런데도 그걸 풀어내야 할 우리 정치는 늘 그 타령의 되돌이표다. ‘다 바꾸겠다’고 호들갑을 떨던 여야 정당은 돌려막기 공천이 끝나자마자 진흙탕 싸움이다. ‘정치 개혁과 정당 쇄신에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유권자가 10명 중 8명이다.

새 정치는 필요하다. 바꿔도 확 바꿔야 한다. “사회 갈등과 일자리 창출, 빈부격차 해소, 자유로운 계층 이동과 같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안 원장의 주장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다. 나아가 그런 나라를 위해 어떤 방향으로 갈 건지, 어떤 방식을 택해야 할 건지다. 한마디로 뭘 어떻게 바꿀지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 없이 정치를 하겠다는 건 설계도 없이 집을 짓겠다는 얘기다.

12·19 대선에 임박해 출사표를 던진다고 해서 대권 주자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안철수 바람’이 거세면 대권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국가 미래를 위해 타당하고 합리적인 정치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다. 실패 사례도 있다. 2002년 대선 때 정몽준 의원, 2007년 대선 때 문국현씨는 여름이 지나서야 출마 의사를 명확히 했다. 국민들은 그런 정치를 타이밍을 살피며, 치고 빠지는 양다리 걸치기로 의심했다.

‘안철수 바람’은 8개월 뒤에 펼쳐질 12·19 대선의 가장 큰 변수다. 새 정치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한국 정치를 수술할 명의로 안 원장을 꼽는 사람이 많다. 안 원장이 새 정치를 하겠다면 그 뜻을 정확하게 밝혀 국민의 궁금증을 풀어줄 의무가 있다. 역량과 됨됨이를 꼼꼼하게 검증 받아야 하고, 검증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줘야 한다.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면 현실정치의 행보를 삼가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대학 강단과 선거판 사이를 오가며 자기 희생 없이 정치 이상만 강조하는 게 새 정치는 아니다. ‘무릎팍 도사’나 청춘 콘서트로 형성된 이미지만으로 대통령감을 판단할 순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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