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짓’ 크게 벌이는 데 소질이 좀 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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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28면

서울 역삼동에 있는 프레인 사옥 4층엔 여준영 대표의 사무실이 있다. 들어서자마자 ‘어른의 놀이터가 있다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 나와도 며칠 너끈히 버틸 수 있다”는 작은 주방이 있고, 그 옆엔 드럼이 놓였다. 수백 장의 DVD와 프로젝터, 누워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의자. 작고 앙증맞은 피규어와 장난감, 포장을 미처 풀지 못한 상자들. 이 산만한 공간이 CEO의 사무실이라고 알려주는 건 커다란 책상뿐이었다. 무릎이 해진 청바지에 웨스턴 부츠를 신은 그와 마주 앉았다.

Who Are You : 부업이 더 화려한 PR 컨설팅 그룹 '프레인' 여준영 대표

-이런 ‘부업’은 왜 하나.
“PR 하는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일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무기력해진다. 유명 브랜드를 PR하면 자신이 브랜드를 만든 것처럼 우쭐하기도 하고, 큰 기업에 취업해 PR을 하면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중에 ‘네 것을 해봐라’라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바꾸고 싶었다. 이 바닥엔 그런 창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좋은 제품의 보도자료를 쓰고 돕는 것도 좋지만, 일을 기획해 잘 만드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와인·카페·영화 같은 건 보통 취미의 영역이다. 프로젝트들은 취미인가, 비즈니스인가.
“모두 하고 싶어 시작한 건 아니다. 필요가 있었다. 카페는 직원에게 커피를 주고 싶어서 출발했다. 직원에게 커피만 주면 비용이 되지만, 확장해서 비즈니스 코드를 조금만 넣으면 원래 목적을 달성하면서 수익도 낼 수 있다. 또 직원이 마실 커피니까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면 우리만 먹긴 아깝다. 작은 일을 크게 벌이는 데 소질이 있다.”
프레인의 광화문 사옥 1층에 있는 퓨어 아레나 얘기다. 2010년 12월 문을 열었는데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 공간으로 떠올랐다. 이뿐 아니라 지난해 그는 프레인 여직원을 위해 구두를, 남직원을 위해 슈트를 제작했다. 카페가 그랬던 것처럼 욕심이 나서 신발 150켤레는 직원 주고, 150켤레는 팔았다. 슈트도 17벌 더 만들어 팔았다. 구두가 약 20만원, 슈트가 79만원으로 싼 것도 아닌데 다 팔려나갔다.

-이왕 하는 거 많이 팔 수도 있을 텐데.
“디마케팅(상품에 대한 고객의 구매를 의도적으로 줄임으로써 적절한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기법)을 하고 싶었다. 처음 아이팟이 들어왔을 때 얼마나 사기 어려웠나. 그게 멋있어 보였다. 내가 뭔가 만들었는데 너무 많아서 누구나 사는 것보다 말이다. 어차피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하는 건 ‘본업’에서 했다. 내가 만든 것을 가진 분들에게 희소성을 선물로 주고 싶기도 했다.”

책상 옆 책장 위엔 여 대표의 각종 ‘장난감’이 진열돼 있다. 사무실 기둥에 잔뜩 매어 있는 리본들. “좀처럼 버리지를 못한다”는 그는자신의 블로그를 보고 편지와 선물을 보낸 이들의 흔적을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그건가. 일부러 안 키우는 것?
“마이너의 피가 약간 흐르는 것 같다. 만들었을 때 많이 팔리는 것보다 그걸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기는 데 더 희열을 느낀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소비자가 생기면 듣기 싫은 소리도 많이 듣게 된다. 대중이 얘기하는 걸 다 고려할 필요 없이 좋아하는 사람들 안에서 놀고 싶은 거다. 욕을 많이 먹는 커피전문점이 있다. 커피전문점이 못해서가 아니다. 소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말은 많아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브랜드로 제품을 기획·제작하던 그는 얼마 전 영화를 수입했고, 배우 매니지먼트를 시작했다. 아카데미 수상으로 관객몰이를 한 ‘아티스트’가 누적 관객 11만 명을 넘겼는데, 소리 소문 없이 그가 개봉한 영화 ‘50/50’은 15만 명이 들었다. P&A(필름 프린트 비용과 마케팅 비용)에 2억원을 들여 매출 11억원을 올렸다. “매출이 어떻게 배분되는지 끝날 때까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문외한의 첫 영화 프로젝트였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영화 같은 전문 분야의 일을 어떻게 하나.
“운동신경이 좋다, 디자인 감각이 있다, 음감이 있다고 할 때의 ‘감(感)’과 ‘신경’이 전문 지식보다 중요하다. 이런 감각은 공부해서 짧은 시간에 습득되지 않는다. 유전이나 어린 시절 환경 덕에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는 경우가 있고, 뒤늦게 습득하기도 한다. 나는 후자다. 만약 내게 디자인 감각이 있다면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보고, 듣고, 만나고, 사면서 키워진 감각인 것 같다. 그런 감각엔 ‘보는 눈’도 포함된다. 제작자·기획자·마케터가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 실행하는 능력이 없어도 모든 걸 리드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감은 어떻게 키웠나.
“영화 수입에 대해 ‘쟤는 갑자기 영화 해서 돈 벌었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건 아니다. 몇 년 전에 신문에서 ‘원스’를 수입한 진진영화사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나도 해야지’ 하고 알아보고 다녔다. 직원한테 ‘내가 5000만원씩 줄 테니까 매년 영화를 사 와라. 10년 실패하면 5억원인데 그 정도는 손해볼 수 있다. 설마 한 명도 안 들겠나’라고 했었다. 이건 흐지부지됐지만 결국 ‘50/50’까지 온 거다. 충동적으로 수입한 게 아니다. 영화 수입하고, 배우 매니지먼트 하면서 지금도 매일 영화를 본다. 식당 시작할 때도 매일 돌아다니고 매일 먹었다. 지금도 특이한 걸 많이 사는데, 내가 뭔가를 사는 건 몇 년 뒤 제품이 나올 거라는 얘기다. 나는 기획자다. 기획은 전문 지식이란 이름으로 한 영역에 매몰되면 안 된다.”

-난독증이 있어 책을 안 읽는다고 들었다. 보통 CEO들은 독서를 통해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얻는다고 한다.
“끝까지 읽은 책은 어려서 읽은 『삼국지』와 성인이 돼 선물받은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 같은 것뿐이다. 대신 잡지나 신문에서 토막 정보를 많이 접한다. 아이디어나 통찰은 생각에서 얻는다. 밥 먹을 때도, 조깅할 때도 계속 관심사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 몇 시간 독서보다 파괴력 있는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와 관련해 블로그에 적었던 글을 보여줬다. 간혹 그가 책을 못 읽는다고 ‘업신여기는’ 독서광들에게 해주는 답이란다.
‘책을 1년에 100권 읽는 사람은 책 읽는 데 한 300시간 정도 쓸까요… 많이 성장하고 발전하겠죠. 사람들은 책 안 읽는 사람을 마치 그 시간 분량의 지식과 발전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는데요, 저는 책을 안 읽고 못 읽는 그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나쁜 게 아니라, 안 읽으면 그 시간을 어딘가 쓸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왜 그 어딘가가 책 읽는 시간보다 가치없다고 단정을 지을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와의 사이에 둔 테이블 위엔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영국의 파이돈 출판사가 펴낸 『NEW Technologies:products from phaidon design classics』이다. 작은 라이터부터 가구, 주방용품, 가전제품, 비행기까지 세월을 초월한 뛰어난 산업 디자인을 소개한 책이다. 책 사이사이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는데 “갖고 있는 제품이 나온 페이지에 붙여 봤다”고 한다.

-잡다한 것에 관심이 있나 보다.
“많다. 신문 스크랩도 말이 스크랩이지 한두 장 빼고 다 찢는 날도 있다. 무엇보다 하는 일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보통 사람도 아내가 임신하면 길에 임신부만 눈에 띄지 않나. 나는 비즈니스할 때 그게 발휘된다. 지금 ‘50/50’ DVD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게 머릿속에 꽉 차 있다. 꿈에서도 생각한다. 하나에 꽂히면 그렇게 며칠을 가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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