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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발라드 속에 더 돋보인 판소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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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호 16면

서편제 1976년 발표된 이청준의 연작소설집 ‘남도사람’에 수록된 단편소설. 소리에 강하게 집착하는 아버지 유봉과 의남매 송화와 동호의 가슴 아픈 한에서 피어난 소리의 예술을 그린 작품이다.

하늘하늘 날리는 한지를 조각조각 이어 붙인 스크린들이 미닫이문처럼 열리고 닫히며 만들어내는 겹겹의 화폭. 그 뒤로 숨었다 나타났다, 때론 빙빙 돌며 펼쳐지는 한국인의 한 서린 인생의 풍경들.

뮤지컬 ‘서편제’ 4월 22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

뮤지컬 ‘서편제’가 대극장의 스케일을 입고 돌아왔다. 2010년 이지나 연출, 조광화 극본, 윤일상 작곡, 김문정 음악감독 등 국내 최고의 제작진이 모여 야심차게 만든 창작 뮤지컬 프로젝트다. 당시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2011 뮤지컬 어워즈 5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흥행성적은 초라했었다. 중극장의 어정쩡한 공간에 옹색하게 구겨넣었던 무한 스케일의 동양화가 이제야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모양새다. 끝없이 확장되는 여백의 정서가 제대로 살아난 대극장에서 우리 뮤지컬 ‘서편제’는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지를 사용한 상징적인 무대장치는 시각적으로 한국적 정서를 강력히 뒷받침한다. 한지 스크린을 그림자 극장으로 이용해 트라우마처럼 숨겨진 과거의 기억을 비추고 또 가리는 도구로 삼아 무대미술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하얀 백지지만 조명과 영상을 적절히 사용한 풍경들로 화폭을 수놓고 그 안에 수천 겹의 인간 심리를 수용할 수 있는,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찬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한편의 현대무용극을 보는 듯한 앙상블의 조형미 넘치는 군무가 더해져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적은 주인공들을 보완하면서 한국적이면서 세련된 무대미학을 완성했다.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우리 판소리가 이토록 매력적인 장르였음에 눈뜨게 하는 것. ‘서편제’라고 해서 판소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아니라 록, 발라드, 클래식 속에 고이 품었다가 진귀하게 꺼내보이는 형식에 그 비밀이 있다. 요즘 세상에 판소리를 판소리 자체로 풀었다면 신나게 졸았을 터. 인생이 담긴 스토리를 전개하는 가운데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흥겹게, 때론 애달프게 한 대목씩 맛보기로 들려주는 ‘사랑가’ ‘심청가’는 극의 상황과 오버랩되며 너무도 흥미로운 우리만의 콘텐트로 와닿았고, 판소리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호기심마저 유발했다. 시력을 잃은 뒤, 또 유봉이 죽은 뒤 눈물범벅으로 온몸을 떨며 사무친 한을 토해내는 송화 역의 전문소리꾼 이자람은 도대체 울림통이 얼마나 큰 걸까 경이롭기까지 하며, 그 경지에 이르게 한 판소리란 과연 무엇인지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인 정서의 아름다움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고, 또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론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적인 정서란 그 실체가 뭘까? 적어도 ‘서편제’가 담고 있는 정서는 ‘한’이다. 숨가쁘게 달려온 20세기 대한민국. 운명의 굴레에 얽매인 사람들이나, 굴레를 벗고 세상과 타협한 사람들이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소중한 것을 잃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응어리가 ‘한’이다. 부모를 잃은 한, 사랑을 잃은 한, 시력을 잃은 한…. ‘한’의 결정체인 송화로 완벽 빙의된 이자람의 ‘창자를 끊는 듯한’ 절창 또는 절규에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면, ‘한’의 실체는 몰라도 ‘한’의 정서를 뿌리에 간직한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감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 또한 놀라운 경험이다.

엔딩에 5분 이상 이어지는 송화의 심청가는 그 ‘한’으로 도달한 ‘소리’의 경지를 쏟아내는 이 무대의 백미다. 그 ‘소리’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그 어떤 소름 돋는 넘버보다 진폭이 크다. ‘소리’는 끝나지 않고 점점 배경음악에 역전돼 가며 한지 스크린 뒤편으로 멀어진다. 막이 내려도, 한 시대가 가도 ‘소리’는 끝없이 이어질 것을 암시하며, ‘소리’의 여운 또한 무한대로 이어진다. 거대한 역사도, 위대한 인물도 없지만 소박한 개인의 인생에 더 큰 우주가 있음을 본다.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한국의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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