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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쏠 테면 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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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불화의 여신(女神)’ 에리스가 때맞춰 던져준 황금사과가 아니었던들 참으로 맥 빠진 잔치가 될 뻔했다. 그제 막을 내린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말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지상의 영웅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사과를 하객들 사이로 슬쩍 밀어넣는다. 서로 자신이 사과의 주인이라고 우기는 올림포스 여신 3인방의 자존심 대결로 일대 소동이 벌어지면서 파티장은 난장판으로 변한다.

 핵물질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 재앙을 초래하는 파국적 사태를 막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핵안보정상회의는 태생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려운 행사다. 핵물질방호협약(CPPNM), 세계핵테러방지구상(GICNT) 등 온갖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데다 다루는 사안 자체가 일반인의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들끼리 밀고 당기는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전에 셰르파들이 준비한 각본에 따라 연기를 하고, 사진 찍으면 끝나는 그들만의 잔치다. 불화의 여신을 자처한 김정은이 던져준 ‘광명성 3호’라는 황금사과 덕에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는 그나마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서울 정상회의의 최대 수혜자는 김정은이다. 한반도 주변 4강을 비롯해 전 세계 53개국 정상과 정상급 수석대표 및 4개 국제기구 수장들에게 확실하게 존재감을 심어줬다. 광명성 3호가 장외(場外) 이슈를 선점하면서 핵안보정상회의는 사실상 북한로켓정상회의로 변질됐다. 대내(對內) 선전 효과는 말할 것도 없다. 새로 등극한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결단에 미국과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쩔쩔매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MB정부의 고위 외교당국자는 “북한 체제는 김일성이 창시한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는 말을 자주 한다. 김일성교의 제3대 교주가 된 김정은으로서는 신도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하고, 그중 하나로 기획된 것이 광명성 3호 발사라는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는 담력과 지략을 보여줌으로써 신도들의 신앙심과 복종심, 경외감을 앙양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는 것이다. 20대 후반의 새파란 지도자로서는 내부 결속과 체제 안정이 최우선 고려 사항이기 때문에 미사일 발사를 유예키로 한 미국과의 합의나 미사일 쏠 돈으로 굶주린 백성이나 먹여 살리라는 국제사회의 비난 따위는 부차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울 정상회의에 모인 전 세계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발사 중지를 촉구했지만 북한은 ‘개는 짖어도 마차는 간다’는 식으로 예정대로 발사할 가능성이 99.9%라는 게 그의 분석이다.

 문제는 발사 이후의 대응이다. 지금은 중국조차 북한에 자제를 촉구하고 있지만 일단 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응을 놓고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때처럼 미국과 중국이 견해차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 체제의 동요를 원치 않는 중국이 추가적 대북 제재 결의에 반대할 경우 안보리 차원의 대응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11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으로서는 유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처지다. 러시아 대통령에게 선거가 끝나면 유럽 미사일방어(MD) 체제 문제에서 ‘융통성’을 보일 수 있다는 말 한마디 했다가 지금 얼마나 큰 곤욕을 치르고 있는가. 결국 미국은 한국과 일본, 유럽연합(EU) 등과 함께 북한의 돈줄을 틀어막고, 대북 교역을 금지하는 독자적 제재에 나설 것이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3차 핵실험까지 강행할 가능성이 크다.

 만일 지구 관측용 실용위성 발사라는 북한 주장이 맞고, 발사에 성공한다면 북한은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열 번째로 자력으로 위성 발사에 성공한 나라가 된다. 이란의 발사체 기술이 북한에서 도입한 미사일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라고 성공 못하란 법도 없다. 위성 발사에 성공한다면 북한은 이란에 앞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을 동시에 갖춘 나라가 된다. 미국으로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최악의 상황이다.

 불화의 여신이 던진 황금사과는 결국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다. 무력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저지하려면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그럴 각오가 아니라면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쏠 테면 쏘라는 식의 무시 전략으로 나가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리 북한이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 할지라도 ICBM에 핵탄두를 실어 미국으로 날려보내긴 어렵다. 떠들수록 북한 몸값만 올라간다. 더 이상 야단법석을 떨게 아니라 철저한 고립과 혹독한 제재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 북한 스스로 굴복할 때까지 기다려보는 게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