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만화 고유의 효율성 강조한 작품 기대”

중앙일보

입력

# 러시아워 지하철, 40대 중반의 남자
퇴근 시간 지하철에 묵지근한 가방을 끼고 나른한 표정으로 오르는 한 남자.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자 가방을 선반에 얹은 뒤, 곧바로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을 펴든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도 자못 진지한 표정이다.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키득거리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서다. 만화책이었다.

# 새로 나온 책 ‘만화 경제기사 따라잡기’
신문의 경제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한 경제교육 전문가 곽해선 님의 ‘경제 기사 궁금증 300문 300답’(곽해선 지음, )의 만화 버전 ‘만화 경제기사 따라잡기’(곽해선 원저, 윤상석 글과 그림, 더난출판사 펴냄)이 나왔다.

# 만화가 이동수 님과 북스 편집장
- 정말 만화 파워가 세긴 센 모양이야. 라디오에까지 침투한 거잖아. 사정이 어때? 괜찮은 거야?
★ 여전히 만화를 ‘하급문화’로 생각하는 편견은 많아. 만화는 어쩌면 만화 자체의 시장보다는 만화를 포함해서 사진, 영화 등 시각영상 문화로 대표되는 멀티미디어의 발전에 따라서 만화 시장도 커지고 있는 걸로 볼 수 있겠지. 만화 쪽에는 사실 제대로 된 통계조차 가지고 있지 않거든. 만화가 가지는 효율성이 이런 문화 트렌드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 만화의 효율성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 만화는 과감한 과장이 가능하잖아. 영화나 사진에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 그러다 보니, 독자에게 이미지를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거야. 적은 비용으로 영화나 다른 시각적 매체에 비해 극대화한 메시지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거지.

- 우리 자랄 때만 하더라도 만화는 이른바 ‘불량식품’이었잖아. 내 생각에는 그 동안 독서 시장에서 텍스트가 장악했던 공리적인 영향력을 만화 쪽에서도 확대하고 있지 않은가 싶거든. 그게 만화가 대중화할 수 있는 요인 아닌가 싶어. 이를테면 소설이나 시 등 문학의 힘과 거의 맞먹을 만큼 우수한 만화가 나오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잖아.
★ 하지만 여전히 만화는 몰래 보는 아이들이 많아. 굳이 만화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단지 하나의 예술 장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하겠지. 만화는 다분히 감성적인 매체이거든. 거기에 대고 학습 효과 따위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야. 만화는 그냥 만화일 뿐이야.

- 아이들이 만화책을 몰래 본다고 했는데, 나는 그게 만화라는 형식 때문은 아니라고 봐. 문제는 만화라는 장르에 담긴 내용과 그 내용에 따른 속성이 무엇이냐 하는 거 아니겠어? 이를테면 우리 만화에 담긴 내용들이 황당무계한 괴기담이라거나,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폭력, 섹스, 그런 것들을 주요 주제로 하지 않냐 이런 거지. 만화는 중독성이 있잖아. 그런 내용과 속성을 가진 매체라면 환영할 게 없잖아. 예를 들자면 무협지나 텍스트로 된 포르노 소설 따위도 역시 중독성을 갖고 있거든. 나는 이 중독성이 문제지, 만화라는 장르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 그래, 고급 정보를 담아내지 못한 만화 생산자 쪽의 반성도 절감해. 그러나 만화는 워낙 출발부터 대중 속에서 커 온 장르야. 그렇다면 만화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 역시 대중적 감성에 의한 것이어야 해. 물론 이같은 장르적 특성은 앞으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극복해야 할 만화 쪽의 한계겠지. 그러나 어설픈 실험, 혹은 만화로서의 특성을 완전히 살리지 못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어. 요즘 많이 나오고 있는 ‘학습 만화’류를 나는 찬성할 수 없거든. 물론 학습에 있어서의 장점도 많이 갖고 있겠지만 만화의 본령이 될 수는 없잖아.

- 물론이지. 만화는 고급 정보를 전하는 정보 매체라기보다는 엔터테인먼트의 속성을 지닌 장르라고 봐야 하지 않겠니?
★ 출발은 그렇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만도 없어. 만화라는 장르가 앞으로 고급 예술로 발전하지 못할 까닭이 하나도 없거든. 이른바 고급 예술이라 일컬어지는 문학과 만화의 교류라든가, 방송과 만화의 교류 따위는 그러한 실험의 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 만화가 고급 예술로 성장할 수 있는 근거는 뭐고, 그 장애 요인은 뭐라고 할 수 있지?
★ 만화는 한 두가지의 움직임, 때로는 과장된 표현으로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어. 문학에 비유하자면 장편 소설이 아니라 시와 같은 압축적인 장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지. 만화만의 특성이지. 그리고 이 만화가 아직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만화 생산자들의 노력이 모자란 거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아직 만화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거야. 이를테면 장편 만화 ‘장길산’은 굉장히 공을 들인 좋은 작품인데, 소설 원작 만큼 읽히지 않았거든.

- 하지만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만화는 장편이지만 많이 읽혔잖아. 내 생각에는 장길산처럼 다른 장르에서 이미 평가 받은 작품을 만화로 옮긴다거나, 학습 만화 따위의 실험보다는 만화라는 장르 자체의 독립적인 생산이 더 시급하지 않나 생각되거든. 이를테면 일본 만화 ‘초밥왕’ ‘슬램덩크’ 등은 만화 쪽의 창조적 생산물이면서 굉장히 많이 읽혔잖아.

★ 맞는 이야기야. 그러나 그걸 만화 생산자 쪽에만 탓을 돌리면 안돼. 만화가라는 직업이 얼마나 환영을 받는가 하는 것도 생각할 문제야. 또 더 중요한 것은 만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만화에 대한 규제가 너무 많아. 예를 들어 권투 만화를 그린다 할 때, 우리는 주먹과 얼굴이 닿게 그릴 수가 없었거든. 그런 자잘한 제약들이 작가들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거야. 물론 심의에 관계된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농구나 요리 만화 못 그리게 했냐고 하겠지만,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기계적으로 나눠지는 거니?

- 만화 관련 제도가 창작의욕의 불씨를 꺼버리고 있다는 이야기구나.
★ 그러니 우리 만화가 왜곡돼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또 덧붙이자면 고급 만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유통구조도 문제야. 고급 만화를 그린다 할 때, 이 만화를 수용하는 매체가 없어. 만화가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대중성을 무시한 고급 만화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든 상황이야.

- 요즘은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매체가 본격화하는 시절인데, 만화도 개인적인 비즈니스도 가능하고, 스스로 자기 매체를 확장하는 인터넷으로 승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도와 시장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게릴라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인터넷이 매력적일 수 있겠다.
★ 그런 붐이 있었지. 그러나 그것도 거품이 컸어. 지금도 그렇지만 웬만한 포털 사이트에는 만화가 빠지지 않거든. 또 개별적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한 작가들도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차츰 사그러 드는 상황이야.

- 대부분의 만화 사이트에는 오프라인의 만화책을 온라인에 옮겨놨던데 그게 실패 요인 아닐까? 매체의 환경이 바뀌면 매체 스스로도 바뀌어야 하잖아.
★ 그래. 만화가들도 플래시라든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서 새로운 형식의 만화를 창조해내려고 애쓰고 있어. 웹에서의 소통을 꿈꾸는 거지. 그러나 만화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비교적 안정적 시장 구조를 가지는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어려워. 시간과 돈이 많이 투자돼야 하는데, 그걸 보상받기는 다른 장르보다 훨씬 어렵거든.

- 하여간 쉽지는 않겠지만, 초등학교 우등상 부상으로 만화책 한권을 주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 주변 환경도 문제지만, 만화가들도 더 애써야 할 거야.

# 오후 9시 40분 쯤, 승용차 안의 한 남자
30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승용차를 타고 가며 라디오 볼륨을 올린다. 핸즈프리에 걸린 휴대폰의 벨이 울렸다.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좀 있다 다시 통화하자”더니 다시 불륨을 올린다. 열린 창밖으로 라디오 소리가 새어 나온다. 한껏 볼륨이 오른 라디오에서 왁자지끈 뭔가 벌어진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아뿔사! 라디오에서 만화를 방송하고 있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