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음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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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호 36면

“네 곁에 기댄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대고, 다시 한번 아우라의 긴 머리카락을 애무할 거야. 그녀의 날카로운 불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약한 여인의 어깨를 매몰차게 잡을 거야. 그녀가 걸친 비단 가운을 잡아채고 그녀를 안아. 네 품에서 작고 벌거벗은, 힘없이 스러질 것 같은 그녀를 느껴. 그녀의 신음 섞인 저항과 무기력한 울음도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경황도 없이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출 거야. 그녀의 처진 젖가슴을 만지는데 한 줄기 빛이 아스라이 들어오자, 너는 깜짝 놀라 그만 얼굴을 떼고는 달빛이 새어드는 벽의 틈을 찾아. 생쥐가 갉아먹은 눈 모양의 틈에서 은빛이 새어 들어와 아우라의 백발과 창백하고 메말라 양파 껍질처럼 푸석푸석하고 삶은 살구마냥 주름진 얼굴을 비춰. 이제까지 키스해 온 살집 없는 입술과 네 앞에 드러난 치아 없는 잇몸에서 너는 입술을 뗄 거야. 달빛에 비친 늙은 콘수엘로 부인의 흐느적거리고, 주름지고, 작고, 오래된 나체를 보지.”

강신주의 감정 수업 <8> 동경 혹은 서글픈 욕망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Aura)』(1962)는 ‘너’를 주인공으로 하는 2인칭 시점의, 기괴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너, 즉 펠리페 몬테로라는 주인공은 자신이 격정적인 욕망으로 품에 안았던 여인이 젊고 매혹적인 아우라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가 품고 있던 이는 109살이 된 할머니 콘수엘로였다. 펠리페는 콘수엘로 부인이 자신의 조카라고 소개한 미모의 아가씨 아우라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 그녀를 이 늙은 노파의 손아귀에서 구해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라는 단지 콘수엘로가 관념적으로 만든 허구, 그러니까 자신이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모습을 불러낸 상상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이런 반전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푸엔테스는 독자를 위해 마지막 한 방을 숨겨놓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펠리페 몬테로마저 콘수엘로가 만든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돌아올 거예요, 펠리페, 우리 함께 그녀를 데려와요. 내가 기운을 차리게 놔두세요. 그러면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할 거예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펠리페에게 속삭이는 할머니 콘수엘로의 말이다.

이제야 우리는 마치 시나리오 대본처럼 “너는 어떻게 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소설이 쓰인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펠리페마저도 콘수엘로의 관념 속에서만 살고 있는 인물 아니었던가? 마치 영화감독이 배우에게 배역을 지정해 주는 것처럼, 콘수엘로는 펠리페의 모든 행동과 감정을 통제한다. 그렇다. 펠리페를 ‘너’라고 말하는 ‘나’의 정체는 바로 콘수엘로였다. 『아우라』는 콘수엘로라는 할머니가 현실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한 사랑을 다시 되찾고 싶은 열망과 그 비극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었던 셈이다. 상상력의 힘으로 펠리페와 아우라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 잃어버린 사랑의 기쁨을 다시 맛보려는 그녀의 발버둥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콘수엘로는 결코 미친 할머니는 아니리라. 그녀 스스로 자신이 만든 아우라나 펠리페가 모두 자신만의 꿈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관념 속의 펠리페에게 잠시만 쉬어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아우라를 만들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콘수엘로 부인은 자신이 상상하는 사랑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은 시절에나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더욱, 다시 찾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갔던 것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동경(Desiderium)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해 곧 방해받는다.”(『에티카(Ethica)』)

그렇다. 이것이 바로 동경의 본질이다.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충동!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의 욕망이나 충동은 단순한 욕망이나 충동이 아니라 동경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동경의 정의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나 충동”이 바로 동경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속내였다.

마음으로는 아름답고 섹시한 아우라가 되는 것이 가능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사이엔가 동경마저도 지속하기 힘든 109살의 할머니라는 현실로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때 자신을 기쁨으로 달뜨게 했던 사랑의 열정을 다시 소유하려는 노력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콘수엘로 부인에게 아우라는 바로 그녀 자신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할지라도 상상으로나마 아우라를 동경할 수 있다면, 그녀는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동경마저 사라진다면 콘수엘로 부인은 그저 죽어 가는 노파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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