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코’ 화가의 선율, 들어보실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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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작업실에서 바이올린을 켜고있는 황순칠 화백과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딸 상희(13 )양. [프리랜서 오종찬]

“음악이 워낙 좋아서 그럴 뿐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예술가의 고뇌는 보통 사람들의 고뇌와 또 다른데, 물론 음악이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은 되겠죠.”

 황순칠(56) 화백은 “만약 도시에서 태어나고 집안이 넉넉했더라면 미술이 아니라 음악을 했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전남 여수시 소라면 태생인 황 화백은 어린 시절 음악소리가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쫓아갈 정도였다.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음악을 할 수 없었다. 혼자서 그림만 그렸고, 고교 때는 서예도 했다. 군대를 다녀와 23세 때 광주 연진회(남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이 만든 서화가들의 모임) 미술원 1기로 들어가면서 한국화를 배웠다. 27세 때 조선대 미대 입학 후 서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9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탔고, 개인전만도 약 30차례 열었다. 황소·고인돌·배꽃 유화를 많이 그렸고, 요즘은 주로 매화를 그린다. 하얀색을 즐겨 쓰는 데 대해서는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색이고, 나도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광주시 남구 월산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100평(3300) 이나 되는데, 항상 진공관 앰프의 전축 세트에서 음악이 흐른다. 주로 클래식이지만, 팝이나 국악도 즐긴다. 피아노·바이올린·대금과 악보대·악보집도 있다. 황 화백은 “피아노를 대학 때 배우다 말았는데 8년 전 5살 딸 아이와 함께 다시 배웠고, 그 후 꾸준히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개인전 때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독주하기도 한다.

 바이올린은 고교 때 중고를 사 독학했고, 지금도 틈틈이 활을 잡는다. 고향에서 불던 피리를 2000년 대 들어 다시 불었고, 광주시립국악원을 다니며 대금을 배웠다.

 지난해 초부터는 성악도 한다. 광주아버지합창단에서 바리톤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5년부터 해마다 두세 차례 화실에서 ‘화폭과 음악의 세계’를 펼친다. 소박한 무대지만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피아노 독주와 실내악 연주, 재즈·성악 등 서양음악은 물론 판소리와 대금·가야금 등 국악을 망라한다. 직접 무대에 서고, 지인들이 우정으로 출연한다. 꼭 사례해야 할 경우 자신의 그림을 선물한다. 행사 후에는 30~60명의 관객과 함께 화실 부근 식당에서 술과 노래로 뒤풀이를 한다.

 황 화백의 별명은 ‘배코’. 배코는 상투를 앉히려고 머리털을 깎은 자리인데, 흔히 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은 것을 말한다. 1990년 갑자기 머리를 깎고 싶 어 밀었다. 머리 감기가 참 편했고, 이후 계속 배코로 살고 있다.

승려 같은 머리와 강한 눈매가 주는 인상처럼 그는 스스로 다그치며 깔끔하게 산다. ‘생각하는 그림을 그릴 것’ ‘철학을 갖고 할 것’ ‘현실과 타협하지 말 것’ ‘명예와 돈을 생각하지 말 것’. 화실에 써 붙이고 되뇌는 경구(警句)들이다. 다른 작가의 화실들과 달리 그의 작업실은 물감 튜브와 붓·주걱 등이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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