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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문화콘텐트 웹툰이 음란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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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현세
만화가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

후배 만화가들의 웹툰이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될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 “콘텐트가 국가경쟁력이라고 이야기하는 21세기에도 변한 건 없구나”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만화와 함께한 지난 세월, 즐거운 때도 많았지만 괴로울 때도 많았다. 가장 괴로운 건 역시 작가의 상상력을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하는 심의였다.

 나는 1979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했는데 사실 그 이전에 여러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은 모조리 심의에 걸려 출간되지 못했다. 달동네를 그리는 것도, 군인이 휴가 나와서 웃통 벗고 아버지를 도와줘도 걸렸다. 도대체 그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등장인물 표정이 반항적이라고 고치라는 지시도 있었다. 어렵사리 데뷔한 뒤 80년대가 됐다. 신군부는 사회 정화라는 이름으로 만화를 탄압했다. 5월이 되면 만화가들을 모아놓고 띠를 두르게 하곤 ‘불량만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그 치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90년대에 접어들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40대가 됐다.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우리 상고사를 복원해 보고 싶었다. 100권으로 완간할 계획을 세우고 ‘천국의 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미성년자보호법을 위반한 파렴치범이 됐다. 내가 그린 우리나라 상고사가 음란물이라는 거다. 재판이 시작됐고 무려 6년 동안 싸웠다.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역사를 통해 올바른 교훈을 얻는 게 인간의 도리다. 그런데 이 나라는 60년대부터 2012년까지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타의에 의해 만화가의 상상력이 움츠러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웹툰이 마치 청소년을 흉포하게 만든 원흉인 것처럼 ‘유해매체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중 15편은 스스로 성인들만 볼 수 있게 격리조치를 취한 작품이다. 장관상을 받은 작품에도 청소년유해매체라는 낙인을 찍었다.

 난 그들이 그 만화를 제대로 읽었는지 궁금하다. 외설과 폭력 조장을 판단하려면 소재나 표현이 아니라 의도를 봐야 한다. 청소년유해매체라고 통보를 받은 ‘전설의 주먹’ 같은 경우 학창시절 주먹으로 날리던 이들의 쇠락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고 같은 반 친구들을 괴롭혀야겠다고 결심한 아이는 없을 것이다. 미로의 비너스를 보고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적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니 이번 방통심의위의 결정은 작가들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상식 수준을 모독하는 일이다.

 웹툰은 한국의 발전된 정보 인프라와 만화가 만나 태어난 새로운 매체다. 세계의 만화 관계자들은 한국의 웹툰을 ‘정보통신 강국이 만들어낸 대표적 문화콘텐트’로 꼽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 최대의 만화축제인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2013년 한국의 웹툰을 초대했다. 미국의 저명한 만화평론가 스콧 매클루드도 웹툰을 한국 만화계의 도전으로 평가한 바 있다. 만화계 역시 드라마와 대중음악에 이은 새로운 한류 콘텐트는 ‘K코믹스(comics)’가 될 거라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또 심의가 발목을 잡는다.

나는 심의 때문에 작가로서 황금 같은 시기를 법정에 버렸다. 만화계 역시 발전을 저지당했다. 세상이 변했지만 후배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만화에 대한 문외한들이 만화를 재단하려는 시도와 판단은 중지돼야 한다.

이현세 만화가 ·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