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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KBS 교향악단 ‘제 얼굴에 침 뱉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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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강기헌
문화부문 기자

1956년 12월 20일. 명동 시공관에선 KBS 교향악단 제1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창단 3개월 만에 고(故) 임원식(1919~2002) 초대 상임지휘자의 지휘로 열린 이날 무대에선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과 홍난파의 ‘옛 동산에 올라’ 등이 연주됐다. 단원도 일반 교향악단에 비해 적었고 악기도 볼품 없었지만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연주를 마친 교향악단을 축하했다. 이듬해 미국에서 스타인웨이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들여온 KBS 교항악단은 57년부터 매년 5회 이상 정기연주회를 개최했다.

 창단부터 15년간 KBS 교향악단을 이끌었던 임씨는 “KBS홀이 마련됐고 오케스트라 방송도 이곳에서 하게 됐으니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됐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악단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각 개인이 기술을 연마해 좋은 연주를 하는데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취임 1주년을 맞아 월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다.

 그런 KBS 교향악단이 ‘봄, 도약하다’라는 주제로 준비한 666회 정기연주회를 콘서트 당일인 8일 취소했다. 홈페이지에는 공연 10시간을 앞두고 안내문이 올라왔다. 티켓 값은 돌려줄 수 있지만 지난 56년 동안 쌓아 올린 관객들과의 신뢰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KBS 교향악단의 ‘제 얼굴에 침 뱉기’는 예견된 결과다. 단원들은 함 지휘자의 퇴진을 요구하며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최봉락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달 7일 서울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함 지휘자는 교향악단 연주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렸고 학위와 경력이 모호하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후 1달 동안 단원들은 연습보다 방송국과 서울 예술의전당 앞 시위에 집중했다. 공연이 취소된 8일 오후 8시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크누아홀에서 ‘KBS교향악단 정상화 촉구를 위한 음악회’를 열려고 했지만 이마저 성사되지 못했다.

 비대위가 문제 삼은 함 지휘자의 ‘지휘 실력’ 논란은 국내 음악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논란 중 하나다. 주관적인 감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음악적 평가를 두고 ‘이것이 정답’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국내는 물론 해외 음악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올바른 연주’라는 말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초대지휘자 임씨의 말처럼 ‘좋은 연주’란 엄연히 존재한다.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것이 그것이다. 임씨가 말한 ‘좋은 연주’를 함씨와 단원들이 한 번쯤 생각해 봤다면 이번 파행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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