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채권단 벽에 막혀 그리스 주저앉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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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헤지펀드 샛별’인 존 폴슨 폴슨&컴퍼니 회장이 올 1월 과감한 전망을 했다. 그는 “그리스가 올 3월에 파산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가 누구인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예견해 200억 달러(약 22조4000억원)를 벌었던 인물이다. 세계시장이 그의 예측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만했다. 그렇게 볼 근거도 있다. 오는 20일이 그리스가 국채 145억 유로(약 21조4600억원)를 갚아야 하는 날이다. 이른바 ‘그리스 3월 위기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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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유럽 지도자들이 서둘러 행동에 나섰다. 지난달 2차 구제금융 1300억 유로를 투입한다는 데 전격 합의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기민하게 나섰다. 시중은행에 장기자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돈의 홍수’를 일으켰다. 얼어붙은 돈줄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유럽·한국 등 세계 주가가 활기차게 올랐다. 순간 낙관론이 퍼졌다. 폴슨의 예측이 빗나간 듯했다. 시장에선 “그의 영험함이 다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그런데 6일(현지시간) 상황이 돌변했다. 그리스 채무구조조정(워크아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날 현재 워크아웃에 참여하기로 한 비율이 20%(채권액 기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블룸버그·로이터 통신 등이 전했다. 헤지펀드와 그리스의 일부 연기금 등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서다.

 그리스 워크아웃은 국가 단위로는 사상 최대다. 그 규모가 2600억 유로(약 384조8000억원)에 이른다. 시중은행과 뮤추얼·헤지 펀드, 연기금 등이 원금과 이자 53% 이상을 포기하고 나머지는 현금과 30년짜리 새 국채로 받는다. 계획대로 되면 그리스는 빚 1000억 유로 정도를 탕감받는다. 채권단은 참여할지 여부를 8일 밤 10시(한국시간 9일 오전 8시)까지 결정해야 한다.

 채권단 참여율이 낮자 세계시장이 바짝 긴장했다. 3월 위기설이 되살아나는 모양새다. 마침 “그리스가 디폴트(채무불이행)되면 그 충격의 크기가 1조 유로에 이를 수 있다”는 국제금융협회(IIF)의 비밀 보고서도 유출됐다. IIF는 민간 채권단을 대변하는 조직이다. 채권자의 참여를 자극하기 위해 내부용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채권단이 워크아웃 참여를 기피하면서 그 보고서가 음울한 결과를 예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워크아웃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채권액 75% 찬성이다. 채권단 참여율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워크아웃 자체가 중단된다. 그 결과는 2차 구제금융 중단과 이달 20일 그리스 국가부도다. 신용디폴트스와프(CDS) 시장도 패닉에 빠질 수 있다. 채권자들이 CDS 계약을 근거로 보험회사 등에 원금을 대신 지급하라고 나설 게 뻔해서다.

 블룸버그 통신은 “일부 헤지펀드가 디폴트와 대지급 사태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그리스 사태가 발생한 이후 헐값에 그리스 국채를 사들였다. 디폴트 사태가 발생해 원금 100%를 대지급받는다면 횡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워크아웃 중단-디폴트 발생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의 시각”이라고 로이터 통신은 이날 전했다.

 채권자 참여율이 75~89% 정도는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 정도면 워크아웃은 일단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채권자도 참여시켜야 한다. 그래야 2차 구제금융을 지급받을 수 있다. 그리스 재무장관인 에방겔로스 베니젤로스는 “강제이행규정(집단행동 조항)을 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의 힘을 빌려 반대하는 채권자에게도 고통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후폭풍은 만만찮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강제이행도 채권단의 ‘비자발적인 고통분담’”이라며 “CDS 계약에 따라 보험사 등의 대지급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강제로 고통분담을 시키기 위해선 채권자 절반 이상이 참여한 채권단 회의에서 75%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채권자 90%의 워크아웃 참여다. WSJ는 채권시장 전문가의 말을 빌려 “헤지펀드 등이 내심 파국을 기대하고 있어 행복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전했다.
 

비자발적 고통분담

채권자가 미리 합의해 주지 않았는데도 채무국 또는 국제기구의 결정에 따라 원금과 이자가 탕감되는 것. 자발적 고통분담은 신용디폴트스와프(CDS) 대지급이 이뤄지지 않는 반면, 비자발적 고통분담은 CDS 대지급이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CDS는 투자은행·보험회사 등이 채권자에게서 보험료 를 받는 대신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원금을 대신 주기로 하는 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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