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물림 ‘범생이’들의 이유 있는 취미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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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등생들이 달라지고 있다. ‘취미는 독서, 특기는 글쓰기’라며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연필만 굴리던 ‘범생이’의 모습이 아니다.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는 드럼을 연주하며 날려버리고 친구들과는 봉사활동을 함께 다니거나 축구경기를 하며 어울린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취미활동에도 열심인 팔방미인 청소년들을 만나봤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는 취미생활을 통해 날려버린다”는 학생들. 왼쪽부터 이종상(경기 과천외고 2)·한송이(경기 보정고 2)·김채운(경기 상현고 1)·양해인(경기 보정고 2)·윤현호(한국국제학교 11)·이건희(경기 보정고 2) 학생. 황정옥 기자

“요즘 애들은 공부를 엉덩이로 하지 않고 머리로 하죠.”

이건희(경기 보정고 2)군은 “공부가 안 될 때 억지로 앉아있는 건 시간낭비”라고 잘라 말했다. 건희는 공부하다가 막히거나 책상 앞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을 때 드럼 연주를 하러 간다. ‘펑펑’ 하며 크게 울리는 드럼 소리를 듣다 보면 마음에 응어리진 게 풀리고 머리가 시원해진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드럼을 처음 시작했다. 영어 성적이 떨어져 학원에 다니다 같은 건물에 있는 드럼 학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영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 안 되고 지루하더라고요.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자꾸 귀에 들어와 아예 드럼 학원도 등록했어요.”

드럼을 시작하면서부터 신기할 정도로 생활에 활력이 생겼다. 영어 학원 가는 일이 전처럼 고역스럽지 않았다. ‘영어 수업 끝나면 드럼 신나게 치다 오면 된다’고 생각하니 하기 싫던 영어 공부도 즐겁게 느껴졌다. 건희는 “마음속으로 일종의 타협점이 생겼던 것 같다”며 웃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실컷 했으니, 공부가 하기 싫더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 성적도 올랐다. 80점대를 오가던 영어 성적이 90점대로 뛰었다. 건희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영어는 꾸준히 1등급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상(경기 과천외고 2)군은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연주회도 여러 차례 가졌을 만큼 실력도 수준급이다. 외고에 재학 중이라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지만 바이올린 연주는 계속할 생각이다. 종상이는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성취감을 느끼면 공부에도 자신감이 배가된다”고 설명했다. “공부는 장기전이잖아요. 잘하고 있는지 성과가 눈에 띄지 않아 지치기도 쉽고요. 취미는 조금만 실력이 늘어도 기분이 좋아지고 성취감이 느껴지니까 공부에서 느낀 답답함까지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취미 배경 지식 쌓아 관련 문제 모두 맞춰

취미가 기분을 풀어주는 데만 효과가 있는 건 아니다. 공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한다. 지난해부터 클래식 기타 연주를 시작한 윤현호(한국국제학교 11)군은 “취미를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현호는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데 기타 연주곡 중에 스페인 음악이 많아 배경 지식이 많이 쌓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타 연주곡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스페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건희 역시 “드럼을 배우며 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드럼 연주법이나 뛰어난 드러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드럼과 관련된 책도 찾아 읽고 있다. 그는 “지난해 수능 모의고사 외국어 영역에서 ‘드럼 스틱 잡는 방법’에 대한 지문이 나왔는데 독해도 하지 않고 문제를 풀어 다 맞았다”는 말도 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도 드럼 용어부터 생소하니까 독해 열심히 해놓고도 몇 문제 틀렸다고 하던데, 저는 그 분야를 아니까 쉽게 풀 수 있었죠.”

종상이는 “바이올린을 통해 익힌 고급 어휘가 많다”고도 말했다. “바이올린과 관련된 용어가 유럽에서 기원된 게 많아 고급 어휘들과 어근이 겹친다”며 “다른 친구들보다 고급 단어들이 친숙해 어휘력을 늘리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하고 싶은 분야 몰입하는 게 최고의 휴식

클라리넷을 배우고 있는 양해인(경기 보정고 2)양은 “‘취미 활동이 곧 휴식”이라고 강조했다. “TV 보고 잠자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끼리 만나 대화하고 연주하는 것이야말로 생산적인 휴식”이라는 것이다. 해인이는 “취미 활동을 하면 시간관리 능력도 생긴다”고 말했다. “연주회 준비를 하면 연습 시간이 많이 필요해 공부할 시간은 부족해진다”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틈틈이 공부하는 게 몸에 뱄다”며 웃었다.

그림이 취미인 한송이(경기 상현고 1)양은 “연필을 잡으면 자유로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기분이 상했을 때도 캔버스 앞에 앉으면 마음이 저절로 풀린다는 것이다. 송이는 “주어진 내용을 무조건 외워야 하는 공부와 달리 그림은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면 되니까 부담도 없고 성취감도 크다”고 얘기했다. 태권도 4단인 김채운(경기 상현고 1)군은 “공부에 지치고 피곤하다가도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의욕이 생기니 취미생활로 시간을 오히려 버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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