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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열쇠는육체가 쥐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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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여자와 종이는 무엇이든 참아내는 두 개의 하얀 물건들이다" 고 했다.

누구든 나름대로 보고 해석해 그 의미를 적기를 바라는 여백 상태인 것이 여체와 종이는 닮았다는 것이다.

〈육체와 예술〉은 예술, 특히 18세기 이래 문학과 미술이 어떻게 이러한 여체를 해석하고 작품화해냈는지를 밝히고 있다.

미국 예일대 휘트니 인문학센터장이자 불문학자인 저자 부룩스는 육체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성적인 측면에서의 육체로 본다.

그러나 성은 생식적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환상과 상징의 복합물로 규정된다.

성은 모든 호기심의 원동력이며 지적 행위의 근원이라는게 저자의 성적 육체관이다.

이러한 육체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자신, 혹은 타인의 육체가 쾌락.지식.권력 등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작품 분석에 들어간다.

발자크의 소설에 이르러서 육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들어온다. 발자크의 젊은 주인공들은 자신의, 혹은 타인의 육체를 매개로하여 부와 권력과 명예와 신분 상승등을 꾀하려한다.

이전의 예술들이 여체를 하나의 이상체로 그렸다면 발자크에 이르러 여체는 욕망의 상징덩어리로서 사실적으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나는 마지막 베일이 벗겨져나가는 순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녀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셨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분홍빛을 띤 듯한 그녀의 하얀 육체가 은은한 촛불 아래 반짝였다. 마치 얇은 비단 덮개에 살짝 가려진 조각처럼. 아니, 아니, 그녀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두려워할 신체적 결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발자크의〈상어 가죽〉한 대목으로 아무리 구애해도 받아들이지않는 여인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혹시 신체적 결함이 있어서 성적 결합으로 대표되는 모든 사회적.경제적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나하는 마지막 의문을 여인의 나체에서 풀고자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완벽한 나체를 보며 작가는 모든 욕망을 지운다. 욕망의 상징이 아니라 육체를 육체 그 자체로 돌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육체는 이제 육체 스스로 말을 하게 된다. 그런 육체를 우리는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유럽 문명과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낀 많은 지식인.예술가들이 원시의 땅으로 떠난다.

그렇게 떠난 고갱도 남태평양 타히티에서 여성을 통해 원시성을 회복한다.

고갱이 그린 그곳의 여인들은 문화적 관습에 갇힌 살롱의 비너스가 아니라 원시적 햇살 아래 드러난 건강한 육체다.

훔쳐보는 죄의식 없이 풍만하고 당당하게 말을 걸어오는 육체다.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육체가 아니라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육체가 지금 우리 세계의 모든 문화와 행위를 압도하게 됐다.

육체에 대한 탐구서도 많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나온 이 책은 사회사.정신분석.페미니즘.문학이론을 다양하게 적용하며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난 육체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면서도 결국 육체는 정의 될 수 없고 매양 새로 쓰여질 수 밖에 없는 여백 상태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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