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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게 고개 내민 홍매화 “봄도 제법이랑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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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해 말까지는 예년 겨울에 비해 따뜻한가 싶더니 1월이 되면서 동장군이 불쑥 들이닥쳤습니다. 전남 순천의 홍매화, 완도의 동백꽃도 꽃망울을 살짝 열었다가 칼바람에 혼이 나 도로 닫았다지요. 지난달 중순부터 날이 조금씩 풀리면서 다시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디에 가면 봄을 만날 수 있을까. 곰곰이 궁리하다 지난달 20일 청산도로 향했습니다.

전국에서 홍매화가 가장 먼저 핀다는 전남 순천 금둔사의 홍매화. 매화는 한꺼번에 와르르 피지 않고 한 송이, 두 송이씩 더디게 핀다. 봄이 한 걸음, 두 걸음씩 더디게 찾아오는 것처럼.

 청산도. 2007년 ‘가고 싶은 섬’과 ‘슬로시티’에 차례로 선정된 전남 완도군의 작은 섬입니다. 영화 ‘서편제’의 명장면, 주인공들이 황톳길을 걸으면서 북 장단에 구성진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바로 그 섬입니다. 바다와 어울려 유채꽃과 청보리가 너울대는 봄의 절경으로 유명하지요.

 ‘청산(靑山)’은 예부터 이상향을 뜻하는 말입니다. 조선의 시인 아무개씨는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시조집 『청구영언』)며 애꿎은 나비에게 떼를 썼다고 합니다.

 흔히 봄 풍경이라면 흙에서 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것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봄이 어디 육지에만 오나요. 바다에서도 싱그러운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이 거세면 파도가 해안절벽을 타 넘고 산꼭대기를 적신다는 청산도 남서쪽의 화랑포 앞바다도 ‘봄 색시’처럼 얌전해졌습니다. 하얀 물보라를 흩뿌리며 거칠게 솟구치는 모양새가 까치 날개를 닮아 섬에서는 화랑포 파도를 ‘간치(까치)놀’이라고도 한다지요.

 “간치놀의 날갯짓을 잠재울 정도이니 봄도 제법이랑께.”

 마을의 어르신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낙들의 바구니에는 저마다 톳이며 매생이, 삿갓조개가 한가득입니다. 톳·매생이의 제철은 겨울입니다. 하지만 살을 에는 바닷바람을 뚫고 무인도의 암초를 누비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바람이 잦아들고 바다가 훤히 열리는 요즘이 아낙들의 해산물 채집에 적기라고 합니다.

 봄이 깊어지면 당리의 돌담길도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들겠지요. 하지만 아직 청산도는 푸릅니다. 청보리 싹을 기운차게 틔워내는 다랑논도 푸르고, 너그럽게 갯것을 내어주는 바다도 푸릅니다. ‘푸른(靑) 산(山)의 섬(島)’이란 이름을 괜히 얻은 게 아니지요. 청산도의 봄은 푸르디 푸르렀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올겨울이었지만 뭍에서도 어김없이 봄의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전국에서 홍매화가 가장 일찍 핀다는 전남 순천 금둔사에서도 지난 1월 홍매가 첫 꽃망울을 틔웠다고 합니다. 눈 속에서도 꿋꿋하게 핀다는 설중매(雪中梅). 그 절개를 높이 사 매화를 사랑했다는 옛 선비처럼 매향(梅香)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나원정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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